Deaka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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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교란 무엇인가

①선에대한 현대의 새로운 관심
② 인더스 문명과 선의 풍토
③ 요가와 선정
④ 선불교성립과 선사상
⑤ 선불교의 사상
⑥ 선불교의 정신과 목적


① 선(禪)에 대한 현대의 새로운 관심.

오늘날 세계적으로 선에 대한 관심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의 과학문명과 더불어 물질만능주의,황금제일주의로 치달리면서 인간성의 말살과 인간 상호간의 신뢰와 불신, 혹은 인간 소외의 현실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에 새롭게 눈뜨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처럼 동양의 마음인 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상은 사실 예로부터 선의 풍토적인 환경속에 살고있는 인도나 중국,한국,일본 등 선불교의 정신에 젖어있는 동양의 여러나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의 문화권 밖에 있는 서구(西歐) 여러나라에서 비롯된 새로운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향은 1927년부터 1934년 사이에 영문으로 출판한 스즈끼 다이세츠 (鈴木大拙; 1870--1966) 의 선학논문집( Essay in Zen Buddhism ) 3권을 비롯하여 그밖에 선불교관련의 저술과 선과 문화 등, 그밖에 그의 많은 영문(英文) 저술이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되면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선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과학문명과 기계화된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서 인간성이 말살되고, 신(神) 중심의 종교관과 인간관의 전통속에서 살아온 서구인들에겐 신에 의한 피조물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인 선을 통하여 자아의 참된 인간관과 각자 스스로 창조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관을 되찾을 수 있는 선의 정신과 선불교의 문화가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 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선의 풍토와 환경속에 살고 있는 동양에서 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고조된 소위 선 붐의 현상은 이처럼, 서구에서 새로운 각광을 받고 널리 주목된 선에 대한 관심이 서구의 과학문명과 함께 동양으로 다시 전래되면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임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진리가 너무 가까이 있기에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이 선의 정신 속에 살면서 매일 매일 사용하고 있기에 더욱 더 그 가치를 바로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② 인더스 문명과 선의 풍토

세계의 고대문명을 통해서 살펴볼 때 고대 인도문명의 독창적인 문화의 하나가 일반적으로 요가(yoga) 라고 불리는 사유와 명상의 문화를 개발했다는 점이다. 요가의 사유문화는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나 철학, 예술 등인도의 전 문화를 배양시킨 원동력이 되고 있음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BC,3000년 -- BC,2500년경에 성립된 고대 인더스 문명(Indus civilization)의 유적지인 모헨죠다로(Mohen-jodaro)나 하랍파(Harappa) 등 의 지역에서 발견된 요가의 사유 명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인장(印章)과 성자(聖者)의 흉상(胸像)으로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처럼, 사실 요가 사유의 문화는 BC, 1500년 경에 인도를 침입한 아리아(Arya) 민족에 의해서 이루어진 문화가 아니고 인도 고대 원주민(토착민)인 드라비다(Dravida)족과 문다(Moonda) 족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독창적인 사유 명상의 문화라는 점이다. 특히 모헨죠다로나 하라파 등의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활석제(滑石製 )로 만들어진 인장에는 신의 모습과 환상적인 그림, 성스러운 나무 등, 반상형(半象形)문자와 400여종에 달하는 음절(音節)문자와 표의(表意)문자 등의 기호가 새겨져 있는데 아직 이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그 가운데 모헨죠다로에서 출토한 3개의 인장 가운데 수주(獸主 : Pasupati)의 모양과 요가 사유의 좌선하는 모습이 새겨진 문양들이 보이고 있다. 요가 사유의 좌선하는 모습이 새겨진 인장을 보면, 좌선상(坐禪牀)위에 양쪽 다리를 편안히 벌리고 앉아 두 손을 양쪽의 무릎위에 가볍게 올려놓고 엄지 손가락을 받치고 있으며 깊은 명상의 세계에 몰입한 성자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또 모헨죠다로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실제로 요가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제의 흉상(石製胸像)이 발견되었다. 이 흉상은 BC, 2000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오늘날 수행승들이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어깨의 맨살을 들어내 보이고 있는 의상을 걸치고 있으며,눈은 반쯤 뜨고, 코는 높이,입은 꼭 다물은 표정의 용모는 바로 요가를 수행하고 있는 성자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적의 자료들을 통해서 살펴볼때 고대 인더스문명을 이룩한 원주민들이 요가 명상의 사유를 통한 종교적인 실천을 전개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고대 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독창적인 요가 명상의 사유법이 인도라는 지역에서만 개발하고 발전하게된 것일까? 다시말해서 요가 명상의 사유법이 인도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이유와 조건, 그 원인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 중요한 요인의 하나를 인도가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인 조건과 기후 등에 의한 풍토적인 입장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풍토(風土)란 인간이 살고 있는 생활환경 그 모두를 말한다. 인간은 옛부터 각자가 살고 있는 생활환경속에서 사유하고 노력하여 보다 좋은 생활의 지혜와, 정신적 육체적인 안정과 평안, 그리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가라는 사유법도 고대 인도인들이 지리적 기후 풍토적인 생활환경 속에서 생활의 지혜로 이룩한 종교문화이기에 그러한 요가 사유의 명상이 형성 될 수 있었던 환경과 조건 등을 선의 풍토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지형적으로 북쪽에는 히말라야산이 우뚝 가로질러 솟아 있고, 왼쪽에는 인더스강, 오른쪽에는 갠지스강이 흐르고 있으며, 기후적으로는 서남 계절풍이 부는 몬순(Monsoon)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몬순지대는 약 반년을 주기로하여 겨울에는 대륙에서 대양으로 ,여름에는 이와 반대로 대양에서 대륙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대륙 변방지대이다. 인도에는 이러한 계절풍이 부는 4월에서 7,8월까지의 우기에는 거센 비 바람이 불어닥치며 많은 비가 내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밖에서 일을 할 수도 없고, 또한 다닐 수도 없다. 인도 뿐만아니라 동양인들은 집을 짓고 가정을 꾸미며,농사일을 하면서 안정되고 정착된 생활을 영위하는 농경문화인이다. 따라서 대지나 흙, 산천초목은 물론, 눈 비 바람 등 모든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즉 인도인들은 몬순이란 계절풍과 더불어 세차게 몰려오는 비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자연의 은혜를 참고 받아 들이며,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을 하였다. 사막에서나 농경지대에서나 비(물)는 그야말로 생명수이며 감로수이다. 산천 초목 등 대지의 모든 존재를 양육시키는 생명수이기도 하다. 때문에 인도인들은 대지의 생명수와 같은 그러한 자연의 은혜를 받아 들이기 위해 몬순의 계절풍이부는 우기철에는조용히 집안에서 요가 사유의 명상을 하며 몬순이 끝날 때 까지 참고 기다렸다.

사막에서 살고 있는 유목민들은 보다 좋은 생활환경을 찾아다니기 위해 항상 끊임없이 옮겨 다니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유목민들의 생활풍습에서 정신적인 안정으로 전개되는 요가 선정의 사유의 문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고대 인도인들은 몬순이라는 거센 비 바람이 부는 우기에는 외부의 출입을 자재하고 가만히 집에서 안주하여 신(神)을 사유하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관찰하며, 괴로움(苦)의 세계인 이 사바세계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는 종교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요가 사유의 문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한가지 주의 할 점은 몬순이라는 계절풍과 기후나 풍토가 인도인의 정신인 요가, 사유의 문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인도인들의 예지와 종교적인 정신이 그러한 풍토를 이용해서 신(神)을 사유하고 자신의 존재를 사유 명상하며,종교적인 인생과 삶의 지혜를 창조한 것이라는 점이다. 불교에서도 붓다 당시부터 몬순의 계절풍이 부는 우기에는 일체 수행승들이 유행(遊行)을 하지말고 사원(精舍)에 머물며 안거(安居)하면서 선정(禪定)을 닦도록 하는 수행생활을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기간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③ 요가(yoga)와 선정(禪定)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선(禪)이란 말은 고대 인도의 사유 명상법인 요가(yoga)에서 비롯된 것인데 붓다의 깊은 사유와 정각(正覺)을 통하여 불교의 실천 수행인 선정(禪定)으로 체계화된 말이다. 여기서 먼저 요가나 선정등에 대한 어원과 기본용어, 그리고 그 말의 개념부터 정리해 보자.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같이 요가의 기원은 BC, 3000 년경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된 고대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서 발견된 요가 수행자의 모습이 새겨진 인장(印章)이나 성자의 흉상(胸像)등의 발굴로 입증된 것처럼, BC, 1500년경 아리아 人(Aryan) 들이 인도를 침입하기 이전에 이미 고대 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실행된 요가 명상 사유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요가 사유의 문화는 약 5000년 내지 그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가(yoga)란 각자의 산란된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통일시키는 수행방법을 말한다. 요가(yoga)란 말은 ?연결시키다?라는 의미로서, yuj(연결하다)라는 어근(語根)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영어의 yoke (멍에)라는 단어도 같은 어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결합 억제 등의 뜻이며 또 유가(瑜伽)라고 음역(音譯)하고 상응(相應)이라고 의역(意譯)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요가라는 말이 사유하다 명상하다라는 의미로 문헌상에 최초로 기록되고 있는 곳은 BC, 6 세기경에 성립된 카타카- 우빠니샤드 : Kathaka-Upanisad 이다. 이 책에서는 명상 사유를 통하여 다섯가지 감각(五感)을 제어하고 ,산란된 마음을 정지시키는 것이며, 이와같이 모든 감각 기관이 정지되어 움직이지 않고 잘 유지해 가는 것(執持 : dharana)을 요가라고 한다.? 라고 요가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카타카- 우빠니샤드에는 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항상 긴장하지 않고, 밝고 분명한 인식[明識]도 없는 지각에 대해서는 ,그 지각기관은 마치 말이 주인들 대하듯 유순하지 못하다. 그러나 항상 긴장하고 밝고 분명한 인식이 있는 지각에 있어서는 모든 감각 기관이 마치 잘 길들여진 말이 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유순하다. 카타카-우빠니샤드에서 말하는 항상 긴장된 마음 (sada uktena manasa) 이라고 하는 한 구절이 바로 요가의 실천 내용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밝은 인식[明識 ; vijna] 혹은 지각은 주인에, 마음[意]은 고삐에 비유되고 있는 것처럼, 긴장된 마음은 팽팽하게 잡아 당기고 있는 고삐와 같은 상태를 말한다. 고삐를 잠시라도 늦추면 말은 다른 곳으로 달아나고 마는 것처럼, 마음을 잠시라도 놓치말고 한 곳을 집중하여 항상 긴장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요가라는 말의 의미는 말이 제멋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말고삐를 말뚝에 꼭 묶어 두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산란된 마음을 어떤 하나의 대상에 연결시켜서 사유하고 명상하며,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안하게하는 정신통일의 수행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요가의 수행법은 인도의 모든 종교 내지 철학의 모체가 되고 있는 수행법인데, 불교의 선정도 붓다가 처음 이러한 요가의 수행법을 받아들이고 이를 한층 더 발전시키고 독자적인 깨달음의 선정(禪定)과 지혜와 인격을 형성하는 불교의 기본 수행으로 체계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 요가와 같은 말로 선나(禪那 : dhyana)와 삼매(三昧 : samadhi) 라는 말도 우빠니샤드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불교에서는 요가라는 말보다 선나(禪那),혹은 선정(禪定), 선(禪) 이라는 말로 일반화되었으며, 지관(止觀), 선바라밀(禪波羅蜜; 禪定의 완성) 이라고도 한다. 선, 혹은 선나라는 말은 범어 dhyana(드야나) , 혹은 빨리어 jhana(쟈나) 라는 말을 중국의 한자 로 음사한 말이다.

한자로 선(禪)이란 글자는 원래 땅을 깨끗이하여 천지의 신과 산천에 제사를 올리는 의미이며, 또 토지를 열고 타툼없이 평화스럽게 왕위를 물려주는 선양(禪讓)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선(禪) 이라는 한자에는 원래 요가나 드야나와 같은 사유나 명상의 의미는 없는데, 경전을 번역할 때 중국인들이 드야나(dhyana), 혹은 쟈나(jhana)라는 말을 선나(禪那),혹은 선(禪)이라는 말로 음사하면서 새롭게 선정(禪定)이 요가 사유의 의미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말로 정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범어 dhyana 와 빨리어 jhana 는 우빠니샤드?에서는 yoga 와 마찬가지로 사유와 명상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dhyana 는 중성명사인데, 이 말의 어근인 dhyai 는 깊이 생각하다 숙고하다라는 동사이다. 이 말을 중국에서는 조용히 생각하다라는 의미로 정려(靜慮) 혹은 선사(禪思)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선사는 음역과 의역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는데, 선나(禪那), 선사(禪思)의 줄인말이 선(禪)이다.

붓다는 요가라는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말을 사용하긴 했지만,당시 브라흐만들이나 이교도들의 사상과 실천적 차원이 다른 입장에서 불교 선정의 내용을 지관(止觀) 으로하는 dhyana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불교의 사상과 실천적인 입장에서 선정의 내용은 지(止, samadhi, samatha)와 관(觀, vipasyana) 이라고 할 수 있다. 止(samadhi)는 집중하다 라는 의미인데 일반적으로 삼매(三昧)라는 말로 유행되고 있다. 관(觀, vipasyana) 은 지혜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교의 선정은 고대 인도의 요가처럼 고요히 앉아 산란심(散亂心)을 없애는 명상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삼매의 경지에서 근원적인 지혜로 일체의 사물과 진리를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을 갖추어 지혜로운 자기의 삶을 전개하는 생활의 종교인 것이다. 선은 또 선정(禪定)이라는 술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의 정(定)은 samadhi (三昧) 라는 말을 번역한 ?집중하다?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남성명사인데,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며 하나의 대상에 주력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등지(等持)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처럼 dhyana 나 samadhi 라는 말에는 모두 선정(禪定)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시불교의 실천덕목인 8정도(八正道)의 정정(正定 ; samma - samadhi )은 samadhi 를 번역한 말이나, 대승불교에서 보살도의 실천인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인 선정(禪定)은 dhyana 를 번역한 말이다.
④ 선불교의 성립과 선사상

선은 불교의 정신을 배우고 직접 실천하여 각자가 스스로 진리를 체득하게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수행을 말한다. 불교의 역사적인 발전과 더불어 각각의 시대와 인도나 중국,한국 등 의 지역에따라 다소의 차이점은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불교의 수행과 실천은 선이 중심이 되고 있었음엔 변함이 없다. 사실 선은 붓다가 제시한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를 각자가 직접 실천하는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선은 불교의 정신을 깨달아 자기화하고 생활화하고 인격화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며 수행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수행과 실천사상도 시대의 변화와 지역적인 발전에 따라 다양화됨과 동시에 각각의 시대와 지역, 민족에 맞는 사상과 실천정신으로 발전시켰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중국에서 발전된 조사선(祖師禪)의 선불교(禪佛敎)가 형성된 점이라 하겠다. 사실 오늘날 스즈끼(鈴木)의 활약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선불교(Zen-Buddhism) 는 당나라 시대에 완성된 조사선의 선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지에서 널리 실천하고 있는 간화선(看話禪) 혹은 공안선(公案禪)도 조사선의 새로운 발전인 것이기에 우선 조사선의 선불교를 잘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선은 인도에서 발생되었지만 선불교의 선사상은 중국에서 완성된 것이다. 선불교는 인도에서 형성된 요가 명상이나 불교의 선정법이 아니라 당대의 조사들에의해 새롭게 완성된 조사선의 선사상인 것이다.

중국에서 완성된 조사선의 선불교는 단순한 정신집중의 요가나 산란된 마음을 가라 앉히고 번뇌를 퇴치시키는 좌선의 실천적인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佛性)의 자각과 실천, 그리고 본래심의 지혜와 인격적인 덕성을 일상생활 그 가운데 전개하는 생활의 종교로 전개한 것이다.

말하자면 인도에서 전래된 외래의 종교이며 요가 명상법인 선을 중국적인 차원에서 일상 생활의 종교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이 형성된 사실을 돈황본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주장하고 있는 좌선의 정의를 통해서 살펴보자.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다음과 같이 좌선의 새로운 정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 남종(南宗)의 법문(法門)에서는 무엇을 좌선이라고 하는가? 이 법문에서는 일체에 무애자재(無碍自在)하는 것이다. 즉 밖으로 일체의 경계에 임하여 망념(妄念;번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坐)라고 하며, 자기의 불성(佛性)을 깨닫고 산란(散亂)됨이 없는 것을 선(禪)?이라고 한다.

사실 이러한 중국선종의 새로운 좌선에 대한 주장은 인도불교 이래 역사적으로 발전된 선의 실천을 종합하고 있는 종래의 북종선(北宗禪)에 대한 남종(南宗)의 새로운 선사상을 밝히고 있는 유명한 일단이다. 여기서 일체의 경계에 번뇌의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坐)라고 한 것은 우리들의 본래심(本來心)인 불성(佛性)이 본래 청정한 그 당체(當體)를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즉 번뇌나 망상을 퇴치시키는 종래의 선정이나 명상 사유의 차원을 훨씬 벗어나 일체의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고,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佛性)의 입장에서 일상생활상에 흩어지거나 망각되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선불교의 실천정신은 열반경(涅槃經)등에서 설하고 있는 자각의 주체인 불성사상과 금강경(金剛經) 유마경(維摩經) 반야경(般若經) 등에서 설하고 있는 空의 실천을 통한 반야의 지혜를 일상 생활에서 무애 자재하게 전개하는 반야사상을 통합하여 일상생활의 종교로 새롭게 정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도의 요가 명상법이 붓다의 깊은 사유와 깨달음을 통하여 불교의 자각적인 실천 수행법으로 완성되었고, 또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당나라 시대의 뛰어난 선승(禪僧)들이 이룩한 조사선에서는 일상생활의 종교인 선불교로 발전시켰다. 사실 중국선종 혹은 선불교는 수. 당대(隋 唐代)의 여러 종파불교(宗派佛敎) 가운데서도 가장 후대에 성립된 수행불교의 운동으로 성립되었다. 선의 실천 수행을 통하여 각자 스스로 불법을 체득하는 수행자의 집단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즉 조사선의 선불교는 종래의 전불교(全佛敎)의 역사적인 입장과 수. 당대(隋.唐代)의 여러 종파불교에서 주장한 불교사상 및 실천적인 입장을 전부 종합하여 새롭게 자각적인 종교로서 선불교의 사상과 실천 수행을 근본정신으로하여 전개된 실천불교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붓다의 정신을 선의 실천으로 재정립하고, 붓다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복고(復古) 운동임과 동시에 이러한 정신을 중국인들의 정신과 풍토에 알맞는 새로운 현실적인 생활종교로 전개한 종교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당나라 시대에 일상생활 종교인 선불교가 완성될 수 있게 된 것은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중국 고유의 노.장자(老 莊子) 사상과 유교의 현실긍정사상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국인들은 현실을 절대긍정하며 진리를 가까이에서 찾는 현실적인 사유정신과 생활풍토등이 외래의 종교인 불교의 정신을 선의 실천과 수행으로 각자 깨닫고 ,새롭게 현실적인 일상생활 종교로 재편함과 동시 그 가운데서 불법의 참된 정신을 깨닫고 일상의 매사를 본래심으로 진실된 삶을 자각과 지혜로 창조하는 생활불교의 선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따라서 당나라 시대에 완성된 조사선의 선불교는 사실 단순히 번뇌(煩惱)나 산란심(散亂心)을 없애기 위한 좌선의 실천이나 선정을 닦기위한 종파불교의 하나인 선종의 입장이 아니라, 붓다이후 종래의 전불교(全佛敎)를 선의 사상과 실천으로 종합한 중국불교의 새로운 입장이었기에 선불교(禪佛敎)라고 이름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생활종교인 선불교를 완성시킨 사람이 남종선의 조사인 6조혜능(六祖慧能 ; 638--713)이며, 마조도일(馬祖道一 ; 709--788)과 석두희천(石頭希遷 ; 700--790) , 백장회해(百丈懷海 ; 749--814)등 당대(唐代)의 뛰어난 여러 선승들이다.

특히 조사선(祖師禪)의 대성자(大成者)인 마조도일선사는 이러한 생활종교인 선불교의 입장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인간 각자 평상심으로 전개하는 것이 진실한 도) 라고하는 유명한 조사선의 새로운 도의 정의를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역시 앞에서 살펴본 육조단경의 좌선의 정의를 발전시켜 일상의 종교인 선불교의 사상으로 전개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사(祖師)는 선의 실천 수행으로 불교의 참된 정신을 깨닫고 체득한 사람이며 ,또한 붓다의 정법(正法)을 계승하여 지혜와 인격으로 불법을 펼치는 당대(當代)의 교화주(敎化主)인 선불교의 새로운 인격(人格)을 말한다.
⑤ 선불교의 사상.

불교 사상 이외에 또 달리 선불교의 정신이나 사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여기 선불교의 사상을 논하는 것은 불교 정신의 본질이 붓다의 가르침인 경전을 이해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어디까지나 선의 수행과 실천을 통해서 각자가 깨달음을 체득하여 불교의 정신을 자기화하고 생활화하고 인격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선불교의 사상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뛰어난 선승(禪僧)들이 대승불교의 정신을 선의 수행과 실천적인 입장으로 새롭게 정립함과 동시에 이를 현실생활의 종교로 만들어 전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불교의 사상적인 입장과 그 배경을 살펴보자. 선불교의 기본정신은 많고 다양한 대승불교의 사상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불성과 반야의 공사상등 대승불교의 정신만을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전개하도록 간소화하고 있다.

즉 앞에서도 인용한 ?육조단경?의 좌선의 정의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의 사상적인 골격은 대승불교의 실천적인 정신의 핵심인 불성사상(佛性思想)과 반야 공사상(空思想)의 실천이라고 하겠다. 즉 불성(佛性)을 깨닫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만법(萬法)의 근원인 인간 각자 자각의 주체(主體)를 깨닫는 것이며, 그리고 그 자각(自覺)된 각자의 불성(佛性; 本來心)으로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거나 집착되지 않는 空의 실천을 전개하여 반야(般若: prajna)의 지혜로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종교인 것이다. 따라서 선불교의 사상적인 배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금강경 반야경 유마경 열반경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대승 경전에서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 중생이 각자 자기의 자각의 주체인 불성을 깨닫고 , 붓다와 조사들과 똑같이 공의 실천을 통한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여 일체의 경계에 걸림없는 무애자재한 지혜로 자아규명(自我究明)과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전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선불교에서는 언제나 각자의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하고 있다. 선의 수행과 실천방법이나 선사상도 사실 각자의 불성을 깨닫는 방법과 자각적인 지혜를 전개하는 정신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의 수행은 결국 각자의 불성을 깨닫기 위한 기본적인 수행인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하고 견성(見性)을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불교에서 만법(萬法)의 근원인 연기(緣起)의 법칙을 관찰하여 깨닫도록 강조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일체 만법의 근원이 각자의 마음에 있음으로 마음의 법(心法)을 깨달음으로서 일체의 만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에서 일체의 모든 법은 오직 마음이 조작하는 것(一切 唯心造) 삼계(三界)는 허망한 것, 다만 이 마음이 짓는 것일 뿐(三界虛妄 但是心作), 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또 십지경(十地經)에서도 삼계는 오직 이 마음 뿐이다 (所言三界 此唯是心)라고 설하고 있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도 한 마음이 일어나면 일체의 법이 일어나고 ,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일체의 법이 일어나지 않는다 (心生則 種種法生, 心滅則 種種法滅)라고 설하고 있는 것은 선불교에서 각자의 불성을 깨닫도록 강조한 견성사상(見性思想)의 사상적인 배경이 된다고 하겠다.

열반경(涅槃經) 제35권 가섭보살품(迦葉菩薩品) 등에서 일체의 모든 중생이 모두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을 모두 구족하고 있다 라고 한결같이 설하고 있으며, 법화경 제1권 방편품에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할 것임에 의심이 없다.라고 설하고 있다.

화엄경제 35권 보왕여래성기품(寶王如來性起品)에서도 불자여! 여래(如來)의 지혜, 무상(無相)의 지혜, 무애(無碍)의 지혜는 중생의 몸 가운데(身中)에 구족되어 있지만, 어리석은 중생은 전도(顚倒)된 망상(妄想)에 뒤덮혀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 보질 못하고 ,신심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라고 설하고 있다. 또 화엄경 제 10권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도 마음과 부처 및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심(衆生心)인 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설하고 있다.

그래서 마조어록(馬祖語錄)?에서 마조도일선사도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너희들은 모두 각자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이며 이 마음이 부처임을 확신하라. 달마대사가 멀리 인도에서 일부러 중국으로 건너 온 것은 오직 이 상승의 일심법(上乘 一心法)을 전하여 너희들이 각자 깨닫게하기 위한 것이다 (속장경(續藏經) 119--406, a )

이와같이 불교의 경전이나 어록에서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모든 법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각자의 불성을 자각하는 견성(見性)의 주장은 각자 스스로 만법의 근원을 자기의 마음[불성]으로 깨닫아 한 법(法)도 일어나지 않는 근원적인 본래심(佛性)을 깨달아 각자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를 구족하여 참된 진리의 삶을 살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경전의 주장을 문자상의 이해로 끝나지 않고 직접 선의 수행으로 깨닫아 자기의 것으로 만들도록하는 것이 선사상인 것이다. 즉 각자의 불성을 깨닫는 견성은 각자의 마음에 구족되어 있는 붓다의 지혜와 덕성을 개발하여 각자의 생활상에 그대로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를 생활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마조도일이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평상심이 그대로 道라고 단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설법은 조사선의 선불교가 일상생활의 종교로 전개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상심?은 몰자각적이고 경계에 집착하여 차별과 분별을 일으키는 범부심, 중생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의 수행과 깨달음의 철저한 체험을 통하여 자각된 근원적인 마음이며 일체의 번뇌나 분별 차별심의 미혹이 없는 본래심인 불성을 말하고 있다.

즉 일체의 경계나 주위의 분위기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어버린 범부심(凡夫心; 衆生心)이 아니라 자각된 주체인 본래심으로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거나 매몰(埋沒)되지 않고 또 걸림없으며,일체의 번뇌나 망념이 없는 근원적인 마음이며, 일상의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는 日常心인 것이다.

이러한 평상심이 그대로 부처이며 ,평상심(平常心)으로 전개하는 그 모든 일상생활의 매사가 그대로 진실된 도(道)의 삶이 된다. 각자의 자각된 평상심(본래심,불성)으로 지혜로운 삶을, 진실에 계합된 평상의 매사를 전개하는 이것이 선의 수행이며 선사상인 것이다.

자각된 평상심(平常心: 本來心)에서 전개되는 지혜가 붓다와 똑같은 반야의 지혜인 것이며 , 이러한 반야의 지혜로 인간의 평범한 일상의 모든일을 걸림없이 무애 자재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종교가 다름아닌 평상심이 도(道)인 조사선의 선사상인 것이다.
⑥ 선불교의 정신과 목적.

선불교는 지난날 붓다나 조사들이 깨닫고 설한 경전과 어록의 기본 정신을 지금 이제 우리들 각자가 붓다와 조사들과 똑 같이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만법의 근원을 스스로 체득하고, 각자 자신의 진실되고 올바른 인생관과 삶의 가치관을 확립하여 일체의 불안과 불편함이 없이 평안하고 안락하게 전개하는 일상생활의 종교이다.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각자의 인생관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체의 권위나 형식 등 피상적인 가치관이나 관념에서 탈피하여 각자 인간 본래의 자연 그대로의 존재인 참된 자아인 본래심[佛性]을 깨닫고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자기를 깨달음의 주체가 주인이 되어 생생하게 살아가는 현실성의 재확인 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은 남의 일이나 외부적인 문제를 대상으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문제로 하고 있다. 철저히 ?지금 여기의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참된 자기 자신을 바로 보고 아는 일이 전부인 것이다. 임제의현(臨濟義玄 ; ? -- 866)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지금(只今) 여기(此處)의 자기(自己)이 주위나 경계 환경의 분위기에 끄달리고 매몰되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신의 본래심이 주인이 되어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임제는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을 ?언제 어디서나 곳에따라 자각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간다면,자기 자신이 있는 곳이 모두 그대로 진실된 세계가 된다. (隨處作主 立處皆眞)라고 설한다.

이상과 같은 선불교의 정신을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불교는 지난날 붓다나 조사들의 수행과 깨달음[正覺]을 모범으로 하여 우리들 각자가 성스러운 인격의 주체인 본래심[佛性]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각된 자기가 붓다와 더불어 여러 조사들과 똑 같이 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정법(正法)의 안목(眼目)을 구족하며 ,붓다와 조사들과 똑 같이 진리의 세계에 손잡고 우리들 각자의 일상생활 그 속에서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전개하는 유희삼매(遊戱三昧)의 생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의 수행과 실천생활로 근원적인 각자의 본래심을 자각하여 붓다와 여러 조사들과 똑같이 반야의 지혜로 각자의 인생관과 종교관을 확립하여 일체의 망념과 근심 걱정, 초조등의 불안에서 벗어난 편안하고 여유있게 각자의 인생과 삶을 유희적인 일상 생활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선불교의 정신은 선의 수행을 통해서 각자의 피와 땀으로 전신(全身)을 투쟁하며 사유하고 실천 연마하여 체득한 철저한 확신과 자기 확립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불교는 남이 대신해 줄 수도 없고,기도와 바램으로만으로도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본인이 직접 스스로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확립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각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