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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수행과 실천

①선불교의 실천 구조.

선불교의 본질은 불교의 정신을 선의 실천 수행과 자각을 통한 체험으로 자기화시키고 구체적인 생생한 생활의 지혜로 전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의 실천과 수행은 선불교의 기본이며 본질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선의 실천과 수행이라고 해서 불교 이외에 달리 선의 실천과 수행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실천과 수행이 바로 선(禪)이기 때문이다.선불교는 이러한 불교의 실천 정신을 선의 수행으로 재정립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자각의 종교인 불교의 실천 구조를 신 해 행 증(信.解.行.證)의 4 단계로 나누어서 체계있게 정리해 볼 수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信)이란 일신교(一神敎)에서 주장하는 창조자인 유일신(唯一神)을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전불교(全佛敎)의 가르침과 실천방법을 철저히 믿는 것이다. 즉 불법승(佛法僧)의 3보(三寶)와 그리고 우리들 각자도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을 구족하고 있기에 필경 성불할 수있다는 그 사실을 철저히 믿는 것이다. 달마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일체 중생이 범부나 성인이나 모두 동일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구족하고 있음을 깊이 확신 (深信)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심신(深信)은 『유마경(維摩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에서 불교의 실천적인 입장에서 중요한 과제로 제시 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입사행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의 참된 수행과 실천은 범부나 성인이 모두 동일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구족하고 있음을 깊이 믿는 것이며, 이것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종지(宗旨)인 것이다.선불교의 실천은 스스로 심원(深遠)하고도 올바른 신념(信念)의 실천인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믿음[信]은 반드시 불교의 올바른 이해[解]와 실천[行],그리고 깨달음[證]으로 이어지는 바탕이 되며 자기의 종교적인 삶의 근본이 되고 출발점이 된다. 그래서 『화엄경』현수품(賢首品)에 ‘믿음[信]은 도(道)의 근원이며 일체의 공덕을 낳는 어머니(信爲道元功德母)’라고 강조하고 있으며,『대지도론(大智度論)』권1에서 ‘진리의 세계인 불법(佛法)의 큰 바다는 믿음(信)으로서만이 능히 들어갈 수 있으며, 지혜로서 능히 건너 갈 수가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올바른 이해[解]는 불법의 정신과 사상, 실천방법등에 대한 바른 이해이며,이러한 확실한 신심과 실천방법을 토대로 한 올바른 수행[行]은 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진리의 세계, 깨달음의 경지를 각자가 체득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행을 말한다.

진리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그 진리의 세계로 가는 올바른 길을 확실히 알게 될때 우리는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자기의 갈길과 목적지를 향해 수행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각자가 직접 오로지 좌선의 수행이며 좌선의 실천 한가지의 일에 전념하여 실참(實參)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좌선 한가지를 중심으로 닦는 수행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도 하며, 혹은 각자의 몸으로 직적 연마하고 수행하는 것이기에 임제선사는 체구연마(體究硏磨)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일행삼매의 좌선수행과 깨달음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붓다나 조사들이 설한 불법의 세계를 자각하여 붓다의 말씀을 직접 확인하고 더 이상 추호의 의심도 없는 확신을 갖게 된 자각을 깨달음( 證)이라고 한다.

깨달음은 지금까지 경전이나 조사의 어록을 통해서 알고 있던 지식적인 불교의 이해와 한계성을 각자의 수행과 체험으로 확신을 얻고, 그러한 불법의 사실을 확인하고 확신을 얻음으로써 각자가 자기의 생활종교로 만들고 확립한 것을 말한다. 즉 불교 정신을 직접 몸으로 갈고 닦아 깨닫고 익힌 불법(佛法)의 자기화(自己化) 한 것이며 혈육화(血肉化)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깨달음은 관념적인 이해나 사고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몸으로 연마하고 익힌 것이기에 철저한 확신으로 불법의 정신이 자기의 인격과 일상적인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승화되고 전개 되는 것이다.

즉 불법의 정신이 생활의 지혜와 인격으로 이루어진 삶이 전개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신.해. 행.증(信解行證)은 불교의 가르침을 각자가 직접 믿고 수행하여 깨달아 자기의 종교로 확립하게 하는 자각적인 종교의 수행구조를 체계있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불법을 배우는 것은 불법을 알기 위한 것이며, 불법을 수행하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선사 도우겐(道元 :1201--1253)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고 있다. 불도(佛道)를 닦는 것은 자기를 수행하는 것이며, 자기를 수행한다는 것은 자기를 무아(無我)로 만드는 것이다. 자기를 무아로 하는 것은 자기가 만법(萬法)으로 실증(實證)되는 것이며, 자기가 만법으로 실증된다는 것은 자기의 신심(身心)및 타인의 신심까지도 모두 함께 탈락(脫落)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해 갈때 깨달음의 자취도 없어지며 그 없어진 깨달음의 자취로 오래오래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불교는 진리에 대한 단순한 관념론이나 인식론에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우리들 각자가 수행과 실천을 통한 체험으로 자각하여 생활의 체험과 지혜로 되살리는 것이다. 실천수행이란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어 불교의 사상을 심화(深化)하는 바로 그것이며 불교의 정신을 각자가 자기의 일상생활의 삶 속에서 자타나 주객(自他, 主客)등 일체의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차별심이 모두 탈락된 망념이 없는 무심(無心)의 행동으로 구현하는 구체적인 지혜의 생활이며 참된 삶을 전개하는 그 사실인 것이다.

②. 선수행의 구조

선수행은 지극히 정신적인 자기 훈련의 방법이다.

인간사회 문명의 형태에서 벗어나 철저한 자기 자유의 탐구라고도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형체가 없는 마음과 정신적인 자기 훈련의 문제이기 때문에 도리어 매일 매일의 구체적인 생활의 형체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선수행의 기본은 좌선(坐禪)과 선문답(禪問答)이다. 좌선을 통한 자기 조명과 선지식(善知識)과의 선문답으로 진실을 깨달아 확인하고 진리인 정법(正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을 확립해 나가는 것이다. 또 좌선을 통한 본래심의 자기 생활로 되돌아 가는 것이며, 선수행의 문제인 공안(公案) 참구를 통한 선문답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여러 부처들과 조사들과의 진실한 대화를 전개하는 것이다.

좌선은 신체적인 수행의 형태이고 선문답은 언어(말)를 통한 구체적인 실천 형태로 볼 수가 있다.원래 정신적으로 인간 존재의 최후의 조건을 추궁해 가 볼 때 신체와 언어의 문제에 봉착되는데 선의 수행은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실천 수행의 문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선수행의 기본적인 구조를 대략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 볼 수가 있다.

㉮ 실천적 행위의 규법을 준수

선수행의 목적은 각자가 일체 만법의 근원인 불성을 자각하고 일체의 차별적인 관념과 개념에서 해탈하고 대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처럼 선은 각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의 확립을 강조 하면서도 그 수행에 있어서는 결코 자의적이거나 방종적인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언제나 일정한 수행 방법의 체계와 행위규범을 엄수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실천적 행위의 규범으로는 첫째로 불교정신에 따른 출가 수행자의 교단 규범인 대소승의 계율이 있고,선원에는 선원청규(淸規)가 있다. 그리고 좌선 수행의 좌선법이 있으며,훌륭한 어느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엄격한 지도와 편달을 받아야 하는 기본적인 규범과 수행의 방법이 있다.선의 수행은 먼저 이러한 실천의 행위와 규범을 준수해야 한다.

종교적인 수행의 출발점이 선각자의 수행과 체험을 통한 말씀을 믿고(信) 올바른 수행으로 그러한 사실과 경지를 추체험(追體驗)을 통하여 확인하고 확신을 얻어 자기의 구체적인 생활의 지혜로 살리며 인격으로 전개하는 것이기에 교주나 종조(宗祖)의 수행방법과 실천이 똑 같은 일정한 규범과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마치 화살로 과녁을 겨냥하는 것처럼,누구나가 한결같이 똑같은 방법과 행동으로 불법의 목적지인 성불이라는 과녁에 맞추어야 한다.성불이라는 과녁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가게 되면 불교가 아닌 것이며, 외도로 전락되는 것이기에 불법의 수행으로는 의미없는 일이 되고 만다. 선수행자의 한결같은 목적으로 강조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은 화살의 목표물인 과녁과 같은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출가 수행의 규범을 원칙으로한 선수행은 먼저 올바른 스승[善知識]의 문하에 들어가 여법(如法)한 좌선과 수행의 지도를 받으며 자기 자신을 수행해 나가지 않으면 않된다.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수행구조를 법문(法門),관문(關門),무문(無門),입문(入門), 입격출격(入格出格)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 문하(門下)에 들어가 스승의 지시와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것을 입문(入門) 이라고 하며 불법을 깨달아 진리의 세계를 체득하는 것을 법문(法門)이라고 한다. 또 진리의 세계의 문을 깨달음의 체험으로 통과해야 하는 것을 관문(關門)이라고 한다. 『조당집(祖堂集)』제5권 운암선사전(雲巖禪師傳)에 ‘ 문(門)으로부터 들어온 것은 참된 보물이 아니다’라는 설법을 하고 있다. 이말을『벽암록(碧巖錄)』第5則에서는 ‘종문입자 불시가진(從門入者 不是家珍)’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외부에서 들어온 것은 어떤 보물이거나 정신이나 사상,혹은 아름다운 말이라도 참된 자기의 보물이나 살림살이가 될 수 없다.

인연따라 얻고 배우고 익힌 것은 결국 때가 되고 인연이 다하면 나가고 없어지게 마련이다. 참되고 다함이 없는 무진장(無盡藏)한 무가보(無價寶)의 보물은 자기의 불성으로 철저한 수행을 통한 체험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말인데, 이러한 선 수행의 구조를 무문(無門),혹은 무문관(無門關)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종의 공안집(公案集)인 『무문관(無門關)』에서는 대도에는 문이 없다.(大道無門)라고 강조하고 있다.

불법의 수행은 철저한 스승의 지시에 따른 수행방법을 이수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구조를 입격(入格)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격(格)은 틀이나 격식(格式), 기준으로 실천 수행의 구조적인 규칙이나 규범, 혹은 틀을 말한다.규범과 규칙을 원칙으로한 실천 수행은 올바른 스승[正師]에게 나아가는 것처럼,여법(如法)한 선수행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모든 교육이나 기술 예술의 배움에는 먼저 그 어떤 기준이되는 격식(格式)에 자기의 모두를 투입시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체구연마(體究硏磨)시켜서 익히고 숙달 시켜야 한다. 즉 자기 개인의 제 맘대로의 자유와 방종을 모두를 버리고 비좁고 부자유스러운 수행의 틀[格式]속에 뛰어 들어가 그 격식과 규칙을 몸으로 익히고 배워 ,그 부자유스러운 그 규칙과 격식의 틀이 몸에 익혀서 자유스럽게 될때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이를 출격(出格),혹은 파격(破格)이라고 한다. 격식(格式)에서 벗어나 자유를 체득한 사람을 임제(臨濟)는 ‘출격견해인(出格見解人)’이라고하며,『원오심요(悟心要)』에서는 ‘출격대도인(出格大道人)’이라고 한다.

선에 있어서의 자유는 이러한 기본적인 수행규범을 익히고 몸에 푹 베이게 하여 그 수행의 규범을 자유 자재롭게 사용하고 구사하며 자기의 평범한 일상생활로 되어버리게 되었을 때 비로소 무애(無碍) 자재롭게 진리의 세계인 법계(法界)에 유희(遊戱)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경지는 규범이나 법규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린 경지에서 마음에 내 맡긴채로 자유롭게 거니는 임운자재(任運自在,闊達自在)로운 해탈 자유인으로 살 수가 있는 것이다.

㉯ 선수행의 간결성과 단순성

선수행의 실천은 무엇보다도 간결하고 단순한 실천행이 되지 않으면 실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선수행은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좌선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좌선이라는 한가지 수행으로 실천하는 곳에 다른 불교의 전사상과 정신을 포용하고 응집한 실천이다. 그것은 단순한 좌선이라는 한가지 수행[一行]이지만 불교의 근원인 진리의 세계를 깨달음의 자각으로 전향시키는 질적 심화(質的 深化)의 수행인 것이다. 즉 한가지의 실천 수행을 꾸준히 닦아야만 깊이있는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 할 수가 있다. 단순한 좌선 한가지만의 실천 수행이라고 해서 폭이 좁고 천박하며 단조로운 것이 아니라 전불교의 정신과 사상을 모두 섭렵하고 충분히 소화한 뒤에 부차적인 것은 모두 제쳐두고 가장 본질적인 것만을 응집하고 집약(集約)하여 좌선의 실천으로 불법의 궁극적인 진리를 직접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한가지의 수행인 일행(一行)의 좌선은 결국 불법의 궁극적인 경지를 자기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며 좌선의 일행으로 모든 불법의 정신을 자기화 하는 가장 구체적인 수행이며 실천법인 것이다.

( 좌선의 실천 방법을 적은 지남서(指南書)로는 송대(宋代) 종색(宗)이 지은 『좌선의(坐禪儀)』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하겠다. 좌선의 기본은 신체를 조절하는 조신(調身),안정된 호흡을유지하는 조식(調息), 그리고 번뇌가 없는 자각된 마음을 갖는 조심(調心)에 있다.)

이처럼 좌선 수행의 기본적인 행위 그 자체는 지극히 간결하며 누구나가 직접 좌선을 참구할 수가 있다. 좌선의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선수행의 기본으로 하고 있음은 단순함과 간결함이 복잡하게 일어나는 번뇌나 두뇌적인 사고를 물리치고 ,반대로 전신심(全身心)을 직접 단적으로 부딪쳐 실행하는 것을 가능케하게 된다.

주관과 객관, 자기 자신과 주위의 경계와의 구분과 차별심이 모두 없어져 그야말로 하나가 되어버린 삼매의 경지는 이러한 좌선의 실천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인간은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살기는 쉬워도 단순한 한가지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그래서 일행삼매의 좌선을 수행이라고 한다. 과학자가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는 것이나, 예술가가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자기의 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도 일종의 수행이라고 할 수있다. 종교가가 좌선의 한가지 일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선수행이다. 이러한 좌선의 수행을 통해서 진리의 자각과 지혜가 체득되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나 행위라고 할지라도 그 일과 행위에 전심전력하여 주관과 객관이 끊어지고 대상이 끊어진 절대적인 경지가 되도록 하는 행위가 일행삼매(一行三昧)인 것이다.

선에서는 이를 한가지 일에 절대적인 수행으로 행한다 (一事에 絶對를 行함)라고 말한다. 즉 지금 행하고 있는 한가지 일에 절대의 자기자신을 모두 혼신(渾身)의 힘을 다 쏟는 수행을 말한다. 선에서는 대나무잎 하나 하나가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다[葉葉起淸風]. 혹은 우리들 인간의 생활에 있어 행동 하나 하나, 행위 한걸음 한걸음에 청풍(淸風)을 일으킨다[步步起淸風] 라는 의미이다.

즉 본래심(本來心)의 자기가 지금,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에 그대로 본래심(佛性)의 전체가 그대로 작용되어 구현되는 삶이 바로 선의 수행생활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 언어나 문자의 매개(媒介)에 의존하지 않는 직접 체험주의

진리의 세계는 각자의 깨달음을 통한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 언어나 문자로서는 보여주거나 전해 줄 수가 없다 라는 의미의 불립문자(不立文字)나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주장은 잘 알려져 있는 선불교의 스로건이다.

이를 언어나 문자의 설명으로는 할 수 없다는 의미로 언전불급(言詮不及)이라고도 하며, 물의 차고 더운 맛은 물을 마셔본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의미로 냉난자지(冷暖自知)라고도 말하고 있다. 즉 불법은 자기의 몸으로 직접 수행하여 체험을 통해서 각자가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사실 선의 문헌은 조사들의 이러한 생생한 수행과 체험의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임제록(臨濟錄)』에 임제(臨濟)선사는 자기의 수행생활과 경력을 회고(回顧)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여러분! 출가 수행자는 먼저 도를 배우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예를들면 산승(山僧)도 지난날 일찌기 율장 공부에 전심하기도 하고 경전이나 논서(論書)의 연구에도 전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율론 삼장이 모두 세상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약(藥)과 같은 것이며, 언어 문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단번에 경전을 뿌리치고 곧 바로 선의 수행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훌륭한 스승과 도반들을 만나게 되어 비로소 도의 안목을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어 이제 천하 선사들의 견해를 바로 볼 수있고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가 있게 되었다.그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곧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몸으로 참구하고 연마하여 (體究硏磨) 수없이 많은 좌선의 수행을 반복하여 충분히 뒤에 어느날 갑자기 깨닫고 알 게 된 것이다.

임제가 주장하고 있는 체구연마(體究硏磨)는 경율론(經律論)으로 표현된 언어 문자에서 벗어나 각자가 직접 선수행을 통하여 불법을 깨닫게 된 사실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처럼 선의 본질은 언어 문자의 경전이나 과학적인 지식,대상적인 인식이나 분석적인 판단에 의하지 않고 직접 체험적인 직관지(直觀智),반야의 지혜로 살아 가도록 하고 있다. 직관적인 지혜나 반야(般若)의 지혜는 임제가 주장하는 불법을 바로 볼수 있는 안목(眼目)이며 진정한 견해(眞正見解)인 것이다. 상대적이고 분별,차별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인식에서 벗어나, 근원적이며 직관적인 지혜로 자기를 전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직관적인 지혜는 우리들 각자의 불성에 구족되어 있는 붓다와 똑같은 지혜를 선의 수행과 실천을 통하여 자각과 깨달음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즉 이성(理性)에 대한 인식을 지식(知識)이라고 한다면 좌선의 실천으로 체득한 직관(直觀)은 믿음(信)에 근거하고 있는것이다. 이 둘은 똑같은 차원에서 서로 상대를 공격하는 관계가 아니다. 믿음은 지식의 한계성을 보완하고, 지식은 믿음의 독단을 수정(修正)하는 것으로 양자(兩者)는 서로 서로 보완의 기능을 갖는다.

선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은 사실 진리에 대한 의심없는 확인이며 철저한 확신인 것이다. 따라서 신(信)은 힘이다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한편 신(信)은 맹목(盲目)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의성(兩義性)은 충분히 자각하고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체험적이고 직관적인 지혜는 구체적인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지혜로 작용되고 있는 것이다. 선의 직접체험주의는 이러한 확신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 실천의 반복과 수행의 지속

선수행의 실천은 일정한 수행방법과 행위의 양식(樣式)인 규범이나 좌선법,청규등 격식(格式)에 규정되어 있는 점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그리고 수행도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좌선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각자 그러한 기본적인 좌선수행의 격식과 규범의 생활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수행은 사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단순한 일행삼매의 좌선실천을 반복하고 지속하는 구조로 성립되어 있다. 단기간의 선수행은 형태상으로는 있을 수 있지만,실제로 수행의 의미와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기간의 수행과 지속을 필요로 하게 된다. 지속(持續)이란 수행생활[行持]의 끊임없는 연속을 말한다. 즉 좌선이라는 단순한 실천행을 반복하고 반복하여 계속해 가는 것이며, 마치 나사모양으로 나아가는 것이 선수행의 기본이 된다.

이것은 출가나 재가를 막론하고 선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좌선의 수행을 계속적으로 지속해야 한다.이러한 좌선 수행의 반복과 끊임없는 지속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지극히 단순화된 행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이성적인 사유의 지배를 벗어나 신체가 거의 기계적으로 규범과 격식(틀)속에서 행위양식에 반응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반복의 과정에 서서히 행위 양식을 안으로 정착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좌선(행위) 규범을 무조건 받아들여 기계적으로 반복하여 이론을 제거하고 지속하는 것이 선수행인 것이며,이러한 단순한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실천만이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선불교 뿐만아니라 거의 모든 동양의 종교에서 추구하는 길을 도(道)라고 말하면서,그 도를 체득하는 수행은 먼저 어떤 형식과 격식(格式=틀)에 자기를 집어 넣는 일부터 출발하고 있다. 일종의 신체적인 조건을 붙임은 계층적인 구조를 갖인 인격의 바탕에 습관화한 행위의 여러 특성과 행동경향을 배양하는 것이 된다.

서경(書經)에 ‘배워서 성(性)이 되도록 한다’는 습성(習性)이란 말처럼,선수행도 좌선의 실천으로 습성화한 자기를 구체적인 샐활의 지혜와 인격으로 그대로 전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선에서는 이를 체구연마(體究硏磨), 숙달(熟達), 순숙(純熟)이라고 하며, 장자(莊子) 에서는 많은 연습과 반복된 훈련으로 단련하고 익혀서 자연의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연달자연(練達自然)의 이야기를 많이 전하고 있다.

㉲ 수행( 修行)의 어려움.

선의 수행은 불법을 각자가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따라서 선불교는 수행과 실천의 종교라고도 할 수 있으며 ,실천과 수행이 없는 선은 선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불법의 수행과 실천이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며 개개인이 각자 충분히 납득 되지 않으면 실천 수행은 될 수가 없다.적어도 종교적인 실천은 깊은 진리의 자각을 수반하고 있다. 선의 문헌들은 모두가 고차원의 실천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선의 수행과 실천은 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조당집(祖堂集) 제3권,조과(鳥)화상전에 조과화상과 백낙천(白樂天)과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화는 그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이야기다. ‘백낙천이 조과화상에게 질문했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수행해야 도(道)와 상응할 수 있습니까?

조과화상이 대답했다. 모든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行하시오.(諸惡莫作,衆善奉行) 백낙천이 말했다. 그 정도의 말씀은 세살난 아이라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조과화상이 말했다. ‘ 세살난 아이가 이 말을 잘 알고 있을지 모르나,팔순 노인이라고 할지라도 이 말을 실행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이처럼 선의 실천과 수행이란 불교의 정신이나 실천방법을 알고 있고 외우고 있는 그 지식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정신과 실천 방법을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의 인격과 정신으로 만들어 실천하고 생활화 하는 삶인 것이다. 경전이나 선지식의 지시를 받는 등, 비록 간접 경험을 통해서 어떤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자기가 몸으로 직접 실천하고, 또 지혜롭게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