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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

경전에서는 붓다가 발견한 진리를 ‘법’(法) 이라 하고 있다. “붓다는 법을 깨달았다.”, 또는 “바른 법(正法)을 성취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법’이란 산스크리트어 Dharma[達磨]를 번역한 말이다. ‘다르마’는 “유지(維持)하다, 보전(保全)하다”라는 동사 ‘DHR’를 어근으로 한 명사로서 규범(規範),의무,사회질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주원리(宇宙原理), 보편적 진리(普遍的眞理)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붓다는 법(法)을 깨달았다. 정법(正法)을 성취했다.”라는 말은 현대적인 표현으로 “붓다는 진리를 발견했다. 진리를 이해했다.”라는 말과 같다.

붓다가 발견한 ‘법’(法)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자료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는 아슈바지트(Asvajit :阿濕毘)비구와 뒷날 붓다의 제일 제자[上首弟子]가 된 사리푸트라(Sariputra:舍利弗) 사이에 있었던 대화이다. 이들 두 사람의 만남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어 붓다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사리푸트라는 라자그리하(Rajagrha:王舍城) 근방에서 산자야(Sanjaya)라는 유명한 스승 밑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탁발하러 나온 아슈바지트 비구(比丘)를 만나게 되었다.아슈바지트는 붓다가 도(道)를 이룬 뒤 처음으로 제자가 된 5명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사리푸트라는 그 비구의 수행자다운 모습과 행동에 감동을 받고 가까이 가서, “그대는 누구이며, 스승의 이름은 무엇이며,어떤 진리[法]를 배웠소”라고 물었다.

아슈바지트는 “나는 나이가 어리고 집을 떠난지도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치를 잘 설명할 수 없으니 이제 간략히 요점만을 말하겠소.”라고 하면서, 붓다로부터 받았던 가르침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때 아슈바지트가 사리푸트라에게 설명해준 내용은 짤막한 한 수의 시(詩)로 전해지고 있다.

모든 것은 원인에서 생긴다.(諸法從緣起)
부처님은 그 원인을 설하셨다(如來說是因)
모든 것은 원인에 따라 소멸한다(彼法因緣盡)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是大沙門說)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붓다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정리하면,“모든 존재[諸法]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생기게 되고, 그 원인들이 소멸되면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시(詩)는 일반적으로 ‘연기법송’(緣起法頌)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연기법(緣起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리푸트라는 아슈바지트로 부터 이 가르침을 듣고 크게 깨닫게 되었다.그 때까지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이었다. 그는 곧, 그의 친구 마우드갈랴야나(Maudgalyayana:目?連)와 함께 스승 산자야를 떠나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중아함(中阿含)의 상적유경(象跡喩經)에서는 붓다가 깨달아 가르친 진리가 ‘연기법’(緣起法) 이라는 것을 좀 더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그것을 사리푸트라가 “여러분, 부처님[世尊]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연기(緣起)를 보면 법(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 라고 비구들에게 가르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본다’라는 것은 ‘이해한다’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법(法)을 이해하고, 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연기법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붓다 자신이 비구들에게 “(그대들이) 만약 연기를 보면 법을 보는 것이고, 바르게 법을 보면 나[붓다]를 보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연기법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연기(緣起)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프라티탸사뭇파다’(pratityasamut pada)를 번역한 것이다. 이 것은 ‘pratitya’와 ‘samutpada’라는 2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pratitya’는 ‘...때문에 [緣]’,‘...에 의해서’ 또는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ada’는 ‘태어남’, ‘형성(形成)’, ‘생김[起]’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연기란 ‘...때문에 태어 나는 것’, ‘...을 말미암아 생기는 것’ 이라는 말임을 알 수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 연기의 원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 335)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此有故 彼有),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此起故 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此無故 彼無),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此滅故 彼滅).


여기에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발생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와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구절로서 존재의 소멸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만이,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 만이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연기법이란 존재의 ‘관계성’(關係性)을 말하는 것이다.

연기법을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상의성’(相依性)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있다.

붓다는 ‘연(緣)’이라는 경전에서 연기를 설명하면서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의성이다. 나는 이것을 깨닫고 이것을 이해하였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마하코티카(Mahakottika)비구는 이 상의성에 대해 사리푸트라에게 갈대 단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비유하면 3개의 갈대가 아무 것도 없는 땅[空地]위에 서려고 할 때 서로 의지해야 설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일 그 가운데 1개를 제거해 버리면 2 개의 갈대는 서지 못하고, 만일 그 가운데서 2개의 갈대를 제거해 버리면 나머지 1개도 역시 서지 못한다. 그 3개의 갈대는 서로 의지[相依]해야 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부연해서 설명하면 A, B, C라는 3 요소가 모여 어떤 존재를 이루고 있을 경우 이들 3 요소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A가 원인이 될 때는 B와 C는 A의 조건이 되고, B가 원인이 될 때는 A와 C는 B의 조건이 된다. 역시 C가 원인이 될 때는 A와 B는 C의 조건이 된다.

경전에서 들고 있는 비유에서처럼 A,B,C라는 3개의 갈대 가운데서 어느 한 갈대가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다른 2개의 갈대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이 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인 것이다. 3개의 갈대 가운데서 1개의 갈대라도 없어지면 다른 2개의 갈대도 서 있을 수 없게 된다. 즉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도 없다”는 것이 된다.

연기법이란 이처럼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관계를 가지므로 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깨어 질 때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연기법을 존재의 ‘관계성의 법칙(關係性法則)’, 또는 ‘상의성의 법칙(相依性法則)’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바로 존재의 보편적인 법칙이고 그 이법(理法)이다. 연기의 원리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났거나 또는 혼자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존재를 성립시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변하거나 없어질 때 존재 또한 변하거나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서로 관계를 가짐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영원한 것도, 그리고 절대적인 것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연기법을 때로는 인과법칙(因果法則),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처럼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은 ‘인과법칙’이라고 하기보다는 ‘상의성의 법칙’으로 보아야 더 정확 할 것이다. 만약 붓다가 발견한 진리가 인과법칙이었다고 한다면 붓다는 인과법칙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불교의 진리가 독창적인 것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과법칙은 붓다 이전에 이미 다른 종교와 사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을 설명할 때 가장 기초가 되고 있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라는 말은,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저것’이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말도, ‘이것’이 사라지는 결과로서 ‘저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과(因果)의 법칙에서는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저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꽃과 열매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꽃이 원인이 되고 그 결과로서 열매가 있게 된다. 이것은 동시성(同時性)을 말하고 있는 연기법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인과적(因果的)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역시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에 의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인과성(因果性)은 후기불교에서 많은 발전을 보게 되고, 그것을 설명하는 다양한 교리들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연기법이 ‘상의성의 법칙’이라기 보다는 ‘원인결과의 법칙’처럼 이해되어져서, 이 2 가지 개념을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연기법은 붓다가 만든 것이 아니다. 역시 붓다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것은 존재의 이법(理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붓다와 같은 어느 한 사람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존재한다. 붓다는 단지 이 법칙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뿐이다.

경전에서는 붓다 자신이 이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제자가 이 문제에 대해 “세존이시여,이른바 연기법은 세존께서 만드신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붓다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붓다[如來]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진리의 세계[法界]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붓다는 이 법을 자신이 깨닫고, 옳게 깨달음을 이룬 뒤에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즉 붓다는 연기법의 발견자이지 발명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는 존재의 법칙인 이 연기법을 처음으로 발견해서 그것을 자신의 문제를 위해, 그리고 중생들의 문제를 위해 응용, 실천했을 뿐이다.

붓다는 이와 같은 사실을 오래된 길[古道]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광야(曠野)를 여행하다가 옛사람이 다니던 오래된 길을 만났다. 그는 그 길을 따라갔다가 사람이 살지 않는 한 옛성을 발견했다.그곳에는 왕궁과 동산과 목욕 못과 깨끗한 숲이 있었다. 그는 이 옛 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모두 그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여행자는 옛 길과 옛 성을 발견했을 뿐이지 그 길과 성을 자신이 개척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붓다도 옛 사람들이 밟았던 길을 따라 수행한 결과 법(法)을 깨달아 붓다가 되었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가르쳐 많은 이익이 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은 붓다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중요한 것은 법(法), 즉 진리이지 사람이 아니다. 붓다로부터 불교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붓다의 존재는 중요하지만, 그러나 법보다는 하위를 차지한다.붓다 자신도 법에 의해서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한 인간에서 붓다로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역시 불교가 목표로 하는 최고의 이상인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붓다라는 한 인격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르친 법(法), 즉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고타마 싯다르타 자신 역시 붓다가 된 뒤에도 그가 발견한 법(法)에 의지하고 법에 따라 살았다는 것이다.

잡아함의 존중경(尊重經)에 의하면, 붓다는 정각(正覺)을 이룬 뒤 앞으로 어떤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정각을 이룬 그가 이 세상에서 스승으로 모시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는 그 자신이 발견한 진리[法]를 의지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붓다는 “오직 바른 법[正法]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정각을 이룩하게 하였다. 나는 그것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리라.” 라고 뜻을 정했다는 것이다.

붓다는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들이 의지하고 따라야 할 것은 사물이나 재산이나 사람이 아니라 오직 법(法)이라는 것이었다. 붓다는 임종을 앞에 두고 서도 역시 제자들에게 그의 사후에 그 자신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하는 대신 “법을 너희들의 스승으로 삼으라.”[法歸依]고 가르쳤다. 붓다는 그를 대신해서 승단을 이끌어갈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고, 제자들 역시 스승이 돌아가신 후 그들 중의 어떤 한 사람을 승단의 책임자로 정해 붓다의 대신이 되게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붓다가 가르쳐준 법을 그들의 스승으로 삼았고 법을 의지해 살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법’이 중요하다고 해서 법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법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법’조차도 버려야 한다. 이것을 중아함(22경)에서는 뗏목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뗏목에 의지해서 강을 건넌 사람은 그 뗏목을 강변에 버려야 한다. 뗏목이 많은 이익을 주었다고 해서 강을 건넌 후에도 그것에 집착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이처럼 법에도 집착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법이 붓다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었으며, 실제로 붓다는 연기법으로서 무엇을 해결했는가. 그리고 연기법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연기법이 진리라고 해도 붓다 자신의 문제와 관계가 없었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의 문제와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연기법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붓다 자신의 문제를 포함한 우리 인간 모두의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붓다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인생의 고(苦:duhkha)문제 였다. 그가 출가한 것도, 6년에 걸쳐 힘든 수행을 한 것도, 그리고 성도(成道)후 45년간 쉬지 않고 모든 노력을 기우려 사람들을 가르친 것도 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였다.붓다의 가르침의 처음과 끝은 ‘苦와 고에서의 해탈’이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고 있다. 잡아함의 삼법경(三法經)에서 붓다는 “(고의 문제가 없었다면) 모든 붓다 세존께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설사 세상에 나왔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붓다, 여래께서, 깨달으신 법을 사람들을 위해 널리 말씀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나는 단지 고와 고에서의 해탈만을 가르친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붓다가 발견한 연기법과 고(苦) 문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라든지, 또는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라고 하는 이 단순한 원리가 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연기법의 입장에서 보면 고(苦)의 고유성(固有性) 또는 실재성(實在性)은 인정될 수없다. 고(苦)는 신이나 절대자와 같은 어떤 존재가 우리를 벌주기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그것은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따라서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과 조건을 제거해 버린다면 고도 사라지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장아함의 대본경(大本經)에서 붓다는 “고(苦)는 성인(聖人)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역시 인연이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변하는 (성질을 가진 ) 이 고를 지혜를 가진 사람은 끊어 없앤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붓다는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고 문제에 연기법을 응용해서, 연기법의 원리에 따라 해결할 수 있었다. 즉 붓다는 먼저 苦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추구한 뒤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그것이 열반이었다. 열반이란 “고의 소멸” 또는 “고에서의 해탈”을 의미한다.

결국 연기법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용해 고(苦)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붓다는 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가르쳤다. 그래서 고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설명과 방법을 고안해 낼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은 지혜의 수준이나 그들의 성향, 또는 처해있는 상황이 모두 달랐으므로 그것에 맞추기 위해 여러 가지 교리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다양한 교리들이 생겨난 된 이유이다. 무아(無我)이론이 그것이고 무상(無常)이론이 그것이다. 사성제(四聖諦), 12연기(緣起), 공(空)의 교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교리의 유일한 목표는 고의 해결, 즉 열반의 성취일 뿐이다. 한 경에서는 이것을 “모든 강물은 바다로 향한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도 한 곳으로 향한다. 즉 고와 고의 소멸로 향한다”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연기법은 불교의 모든 교리들의 사상적,이론적 근거가 된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그 설명이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모두 연기법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불교의 모든 교리들은 연기의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응용이론들이다. 그것들은 연기(緣起)라는 하나의 샘에서 흘러나온 크고 작은 물줄기와 같은 것이다. 모든 존재는 왜 무아인가, 세계는 왜 무상하며 왜 공(空)인가. 그것은 연기적(緣起的)이기 때문에 무아이고 무상이고 공인 것이다.

3. 12연기(緣起)

초기경전에는 ‘연기법’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여러 가지 연기의 형식이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모습을 갖춘 연기가 12연기이다. 이것을 때로는 12인연(因緣)이라 부르기도 한다.12연기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12연기로써 때로는 생멸 변화하는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교리의 근본 목적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苦)’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12연기를 관찰하는 방법에는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이 있다. 순관이란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고, 행(行)을 조건으로 해서 식(識)이 있고,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名色)이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가 있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마지막 항목인 ‘노사(老死)’는 다른 말로 ‘고(苦)’라고 할 수 있다. 즉 순관은 고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유전연기(流轉緣起)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 등으로 말미암아 윤회의 세계에서 생사를 되풀이[流轉] 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緣起)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역관이란 고가 소멸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노사의 소멸까지를 설명한다.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도 한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을 없앰으로서 생사유전(生死流轉)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돌아가는[還滅]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많은 곳에서 12연기를 말하고 있지만 그 설명은 한결 같지 않다. 자세하지도 않고 일관되어 있지도 않다. 특히 각 항목[支]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는 곳은 없다. 따라서 여러 경전의 설명을 참고해서 12연기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1). 무명(無明: avidya)

무명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智慧)이 없다’는 말이다. 올바른 법[正法], 즉 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연기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고,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이다. 고(苦)는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기므로, 무명은 모든 고를 일으키는 근본원인이다.

2).행(行: samskara)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다. 행이란 행위, 즉 업(業:karman)을 가리킨다. 행에는 몸으로 짓는 신행(身行=身業)과 언어로 짓는 구행(口行=口業)과 마음으로 짓는 의행(意行=意業)등 3행이 있다. 행(行=業)은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 때문에 짓게 되고, 그것을 지은 존재의 내부에 반드시 잠재적인 힘[潛在力]의 형태로 남게된다.

3).식(識: vijnana)

행(行)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 식은 인식작용으로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등 6식이 있다. 식이란 표면적인 의식뿐 아니라 잠재의식도 포함한다. 꽃을 볼 경우 꽃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전에 꽃을 본 경험이 잠재의식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꽃을 보았다’는 ‘과거의 경험’은 과거의 행(위) 이다. 따라서 과거의 행(行)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 날 수 없다. 그래서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고하는 것이다.

4).명색(名色: namarupa)

식(識)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있다. 명(名:nama)이란 정신적인 것을, 그리고 색(色:rupa)이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모두 인식의 대상이다. 식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명색[對象=境]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라고 하지 않고,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항인 6입(六入)과 함께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5). 6입(六入, 또는 六處: sadayatana)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6입(入)이 있다. 6입이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意)등의 6 가지의 감각기관, 즉 6근(根)이다. 이것은 인식 기관이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6입이 있다.”라는 것을 좀 더 풀이해서 말하면 “인식의 대상[境]인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인식의 기관[根]인 육입이 있다.”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서 식, 명색, 6입 등 3항목[三支]은, 시간적으로 선후의 관계로 보지 말고 동시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식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인 명색과 그것을 인식 할 수 있는 기관인 6입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식이 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식을 행 다음에 놓은 것이다.

6).촉(觸: sparsa)

6입을 조건으로 해서 촉이 있다. 촉이란 지각(知覺)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心的)인 힘’이다. 촉에도 눈, 귀, 코, 혀,몸,마음등 6개의 감각기관에 의한 6촉(六觸)이 있다. 촉은 6입에 의해서 생긴다고 되어 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6입만에 의해서가 아니고 식(識), 명색[境], 6입[根]등 3요소가 함께 함으로서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수성유경(手聲喩經)에서는 “(根.境.識등) 3요소가 모여서 촉을 만든다” [三事和合成觸]라고 하는 것이다.

7).수(受: vedana)

촉을 조건으로 해서 수(受)가 있다. 수란 즐거운 감정[樂受],괴로운 감정[苦受],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不苦不樂受]과 그 감수(感受)작용을 말한다. 감각기관[根]과, 그 대상[境], 그리고 인식작용[識]등 3 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知覺)을 일으키는 ‘심적인 힘’[觸]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수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는 촉을 조건으로 해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8).애(愛: trisna)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가 있다. 애란 갈애(渴愛)로서 욕망을 말한다. 좋아하는 것을 만나거나 싫어하는 것을 만나게 되면 그것에 애착심이나 증오심을 일으키게 된다. 증오심 역시 애(愛)의 일종이다. 고.낙등의 감수작용(感受作用)이 심하면 심할 수록 거기에서 일어나는 애착심과 증오심도 커진다. 그래서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9).취(取: upadana)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다. 취는 취착(取着)의 의미로서 올바르지 못한 집착이다. 맹목적인 애증(愛憎)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욕망이 생기면 뒤따라 그것에 집착심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10).유(有 : bhava)

취를 조건으로 해서 유가 있다. 유(有)란 존재를 말한다. 초기 경전에서는 취를 조건으로 해서 어떻게 존재가 있게 되는 가를 설명해 놓은 곳을 찾기는 어렵다. 업설(業說)에 의하면, 집착[取]때문에 업(業)이 만들어지고, 업은 생(生)을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유’를 ‘업’이라고 본다면, “취를 조건으로해서 유가 있다”라는 말은 “집착을 조건으로 해서 업이 있다.”라는 것이 된다. 두 번째 항목인 ‘행’을 무명으로 인해 생기는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유는 ‘애’와 ‘취’를 조건으로 해서 생기는 적극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다.

11).생(生: jati)

유를 조건으로 해서 생이 있다. 유(有), 즉 업(業)은 생을 있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유에 의해서 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12).노사(老死: jara-marana)와 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

생을 조건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등 여러가지 고가 있다. 생이 있게 되면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고, 즉 근심(憂),비애(悲), 고통(苦), 번뇌(愁), 번민(惱)등이 발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