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kaksa
   

bulsang

천태사상

5온(蘊).12처(處).18계(界)

(1). 천태학(天台學)

천태학의 교리적 핵심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제법이란 모든 존재란 말이고 실상은 참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제법실상이란 현실의 온갖 사물이 참 존재라는 말로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제2품 방편설(方便說)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묘한 것이 늘 자기 아닌 하나와 하나이기를 기구해왔고 하나되기를 바라는 기대로 역사해왔다. 시대적인 온갖일들이나 나라나 사회의 모든일들이 하나로 모아지면 흥하는 것이요, 흩어져 여럿으로 갈라서면 망하는 흥망성쇠의 역사를 크고 작게 반복하여왔다. 그리고 또 누구나 하나를 중심으로 모으려하고 향해서 달려가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삶이며 정치 경제며 사회문화의 점철이었다. 인류는 하나를 향해 달리고 역사는 여럿으로 흐트려 놓는다. 늘 하느님이나 그 비슷한것들에 매달려 하나가 되고자 하였기에 하늘과 중생이요, 부자와 가난한 자이며 지도자와 시민과 같은 앞뒤의 자리매김은 불변의 규범체계요, 욕구의 지향처였다. 그래서 관념의 골세포에 비장되어 군림하여 왔다. 민주니 사회니 공산이니 자본주의니 하는 것들도 다를바 없이 하나를 지향해 몰아가는 하나놀이였었다. ‘나는 중생이다’라는 자기확인조차도 하나놀이에 불과하다. 나는 유보되고 유보된 나를 중생이라는 허상으로써 수습하여 자기로 삼으려는 헛자리매김인 것이다. 그리하여 허다한 진실과 사실들이 오히려 허상으로 전락하고 하나의 가공된 진실에 종속되어 도리어 허상과 하나되기를 진실스레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천태학에서는 제법실상이라하여 만물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실상임을 주장한다. 그대로의 세계를 인가하는 것이다. 법화경에는 일승(一乘), 일불승(一佛乘), 일실상(一實相)들의 말이 나온다. 이말은 유일한 것 최고 유일신 따위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모든 것을 그대로 똑같이 인가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똑 같다는 뜻은 더욱 아니다. 그래서 이말은 열린 진리, 열린 인간과 서로 통하는 표현이다. 쉽게 말해 여기로 와라 최고가 된다가 아니라, 거기에 그대로 있으라 최고의 자리다라는 뜻이다. 새로 만들려고 하지말라. 이미 되어있다. 헛길로 가지말라 그대로가 좋은 것이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이것이 천태학에서 자랑으로 삼는 일승개회(一乘開會)의 설법이고 제법실상의 사상이며 이러한 법으로 만중생을 구하고자 하였기에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조차 어디론가 하나쪽으로 가고자하는 5천의 무리가 영산도량을 떠나고 만 것이다.

천태학의 관법으로 4상추검(四相推檢)이란게 있다. 수행자의 심요(心要)로서 일심의 4가지 상태를; 일어나지 아니한 일념(未念), 일어나려는 일념(欲念), 현재의 일념(現念), 지나버린 일념(已念)으로 추적할때에, 현재의 일념은 그래도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머물지 않는(無住) 일념일 뿐이므로 결국 일념의 존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일념의 실체가 없다는 것 (空法)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념의 4상(四相)에 일체가 포섭된다 하였으니, 일체에 미혹하지 않도록 미묘한 심법을 관조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일어나지 아니한 마음도, 일어나려는 마음도, 지나버린 마음도 없는 마음일 따름이다. 그런데 자신의 4가지 마음조차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리를 말하고 사실이라 고집한다면 제법의 실상을 허상으로 전락시키는 강제요 무법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천태학의 출발은 평상적인 일념심의 관조로부터 제법실상을 실현해 가는 것이다.

보통은 법화경(法華經)으로 줄여 부르는 묘법연화경을 근본으로하는 종학(宗學)이 천태학이다. 근본경전에 따른다면 법화학이라고 해야 할것이나, 역사적으로 법화학으로서 교학과 종학으로 대성한 이가 중국 남북조시대의 지의(智?, 538- 597)이고, 그의 주거본산이 천태산(天台山)이었기에 천태대사로 불러왔고, 이에따라 후대의 법손인 담연(湛然)이 천태종이라고 한데서 천태학으로 쓰여진 것이다.

법화경은 보통, 불난 집의 비유, 장자와 궁자의 비유, 성채의 비유, 보배구슬의 비유, 초목의 비유 들로서 유명하고 육신을 불살라 여래에게 공양하는 약왕(藥王)보살, 여래를 해치려고 사고쳤던 데바닫다의 이야기하며, 만인의 소망을 들어주는 보문품(普門品)의 관세음보살과 앞장에서 부터 차례로 등장하는 사리불을 비롯한 제자들과 쫓기다시피 도량을 떠나가는 5천 제자의 이야기며, 붓다가 세상에 나타난 큰일의 큰인연(一大事因緣)을 중생에게 길을 열어주고 보여주며 깨닫게 하고 들게하기 위함이라고 밝힌 일들의 갖가지 법문들이 기라성같다. 그중에서도 천태학에서 눈여겨 본, 첫째 대목은 제2품 방편설 중의 개회설(開會說)이다.

개회란 열어서 알게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회의나 행사를 시작하는 의미이듯이 공개회의나 내용의 공개 또는 공식화 대중화의 뜻이다. 법화경의 설법에 이르기까지의 불교가 수행으로는 8정도,연기법, 6바라밀의 3가지 길로 전개되고 교법과 목적과 성취조차도 성문(聲聞)과 연각(緣覺)과 보살의 3가지로 차별하여 왔으나, 이제 법화도량에서는 일승(一乘)일뿐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개회설(開會說) 또는 개회사상이라 한다. 그러나 법화도량의 기준에서는 개회는 곧 묘법의 개회를 뜻하고 바로 제법실상의 개회를 말한다.

온갖 세상일들이 실상(實相)이요 묘법(妙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경전과 비교하여 법화경의 교설이 상대적으로 우수하다고 하는 것이 상대(相對)개회이고, 반면에 법화경이 열리고 나면 제법실상으로서 만물의 절대가치를 개회한 것이므로 상대적인 우열이 아니라 모든 경전의 절대가치를 묘법으로 표명한 평등의 절대(絶對)개회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절대가치의 선언 곧 절대개회에 대한 현실의 모반은 역시 이론이 아닌 현실로서 해결하기를 요청하는 것이 천태학의 두 번째 특징인 교관쌍미(敎觀雙美)이다.

천태학은 교상문(敎相門)과 관심문(觀心門)의 둘로 구성된다. 교상문은 이론부문으로서 세계의 실상과 인간의 본질 등을 다루고, 관심문에서는 4종삼매(四種三昧)와 10승관법(十乘觀法)과 같은 관심수도의 체계를 제시한다. 이론과 수행의 균형이 천태학의 특징중의 특색이다. 이론만의 학문이 있을 수도 없지만 학문은 모름지기 현실이라는 기초를 떠날수도 없다.더구나 종교학의 경우에는 실천적 체험이나 체험을 통한 종교의식(意識)의 성립, 다시 말해 교조의 진리체험과 진리에 대한 절대적 확신없이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 점에서 천태학이 이룩한 독보적인 관행의 체계와 조직으로 말미암아 교관쌍미라는 말을 천태학의 배타적 전용술어로 써내려온 것이다. 천태학의 3번째 특징은 불교라는 이름으로 벌려놓은 다양하고 때로는 모순되고 대립적이기도 한 각종의 경전이나 교리교설을 제외하거나 배척하는 일없이 모아 집대성하고 분석판별하여 질서가 있게 한 점이다. 이점은 역사와 현장의 동행과정에서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의 현실주의며 노장(老莊)의 사변철학마저도 천태사상의 기초영역에서 제외적일 수 없었다. 결국 천태학은 법화경만이 아니라 대소승의 모든 교법과 관심법(觀心法)을 종합정리하고 조화와 통일의 원융(圓融)원리로 집대성한 철학의 기초와 구성원리를 장점으로 한다.

이러한 점이 분열과 괴사의 세포현상을 무한으로 극대화하는 국제화시대의 지구인간이 아쉬워하는 천태학의 순수본질일 것이다.

(2). 천태산의 천태종--천태산 지자(智者)대사 지의(智議)

천태학의 개종자인 천태산의 지의(智議, 538-597)는 보리달마와의 만남으로 유명한 남쪽의 양(梁)나라의 무제때에 형주 화양현(지금의 호남성 병주부 화양현)에서 출생하였다. 20살때에 북쪽으로 가서 제(齊)나라의 대소산에서 법화삼매를 오도(悟道)하였고, 다시 남향하여 진(陳)나라의 수도 금능에서 학풍을 드날리기 시작하여 38세 이후에는 천태산에서 주석하였다. 그런가 하면 진나라가 망하고 난 뒤 수(隋)나라의 천하통일 시대에 생애의 말년을 보냈다. 그래서 보통은 진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수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교화활동은 주로 진나라시대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어느 켠이든 진과 수대에 걸쳐서 천태산을 본산으로 하였기에 천태대사라고 부르듯이 그의 생애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말기에 4개 왕조에 걸쳐진 난세인가 하면 수나라가 통일천하를 실현하는 시기에 있었다.

양나라가 망한 다음해인 18세에 출가하여 진제삼장(眞諦三藏)의 문인이었던 혜광(慧曠,534-613)에게서 섭대승론(攝大乘論)과 유식 등을 배웠으나, 20세에 구족계를 받고는 대현산으로 가서 법화경을 독송하고 방등참법(方等懺法)을 닦았다. 스무세살에 진과 제나라의 격전지를 뚫고서 광주의 대소산으로 남악혜사(南岳慧思 515-577)를 찾아 갔다. 마침 혜사는 전쟁으로 막힌 남행길을 주저하여 대소산에서 법화도량을 개설하고 있었다. 혜사에게 입문한 지의는 법화경 제23, 약왕보살 본사품에서, 80억항하사(恒河沙) 세계의 제불이, 온몸으로 방광하는 희견(喜見)보살의 연신(燃身)삼매의 육신공양을 참정진이요, 참된 공양이며 참보시라고 한결로 찬탄한다는 대목에서 법화삼매를 오도하였다.

그로부터 8년의 보림을 거쳐 30살이 되었을 때에 혜사의 교시로 법희(法喜)등 27인과 함께 남쪽의 수도 금능으로 진출한다. 당시의 금능에서는 오만 제일의 만선자(慢禪者) 법제(法濟)가 약관의 지의에게 승복하자, 지의는 일거에 유명인사가 되고 대인(大忍), 혜변(慧辨), 승황(僧晃) 등의 년배의 대덕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왕후 장상들도 떼지어 청법을 하니 법회일에는 조정의 국정마저 휴무하였으며, 제방의 고승 대덕들이 제자의 예를 갖추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리하여 32세때인 진나라 선제 원년 569년에 와관사(瓦官寺)에서의 법화강회가 천태개교의 발단이 되었다.

다시 8년간의 금능교화 이후 38세의 지의는 천태산으로 들어간다. 입산의 전년에 북제 무제의 불교박해가 있었고, 엄청난 파불에 승려들은 강남으로 피난하거나, 심하게는 4론 학자 정애(靜?)와 같이 참혹상을 한탄하여 분사하는 일마저 있었다.

이에 공리공담에 심취하던 강남의 불교도 법난의 먹구름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지의로서는 이미 법난에 한해 앞서, 일찍이 그의 출가를 도왔던 북제의 장군 왕림(王淋)이 그의 제자이기도 한 진나라 장수 오명철(吳明徹)에 사로잡혀 효수되어 내걸린 처참한 현실을 겪었다. 그러니 절실한 현실에다 결연한 입산일 수밖에 없었다. 사뭇친 수행과 철저한 오도를 이룬 10년후, 영양왕(永陽王)의 권유도 간절했던 두 번째의 금능생활은 본격적인 도량의 개회였다.

왕궁의 정전인 태극전에서 대지도론(大智度論)을 강론하고, 강남 제일의 도량 광택사에서 인왕호국반야경(仁王護國般若經)에 이어, 강남 최고의 고승으로 광택사에서 주석하던 법운(法雲)의 법화소(法華疏)를 흐트리고 새로 묘법연화경문구(文句)를 강론하였다. 50세 때였다.

그러나 52세때(589년)의 정월에 북쪽의 수나라가 금능을 정벌하였고, 뒷날 수 양제가 된 진왕(晉王) 광(廣)은 보살계의 수계제자가 되었다. 한편 그는 지의를 지자(智者)대사라고 호칭하니 그 인연이 입멸후까지 이어져 천태종의 본산 국청사(國淸寺)의 창건에도 큰 힘이 되었다.

지의는 56세에 옥천사(玉泉寺)에서 묘법연화경현의(玄義)를, 57세에는 마하지관(摩訶止觀)을, 58세에는 유일한 친필저술인 유마경의 주석을 짓고 60세에 입적하였으니, 최후의 5년동안 또 한차례 일생의 공부를 정리하는 용맹정진의 족적을 각인하여 이른바 천태삼대부(三大部)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천태학은 천태산의 지자대사 지의가 법화경을 대들보로 하고, 열반경을 기둥으로 하며, 대지도론을 초석으로, 대품반야경을 대문으로 하여 조직한 사상이다. 그래서 천태학은 공관(空觀)에서 한걸음 나아가 만물의 실상을 말하고, 만물이 본래 갖춘 묘덕(妙德)의 구현을 사명으로 한다. 그러한 실상의 묘덕은 온갖 사물에 나타나고 있으니 일상적인 경험의 일들이 모두 묘덕의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철학적으로는 현상 즉 실재론이라 하겠지만, 결코 현상과 실재를 양립자로 보지 않고, 현상계에서 실재를 인식하고 실재와 더불어 현상계가 함께하여, 하나로 보면 원만론이요 둘로 보면 원융론이라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사상으로서는 반야공관에 기초하고, 종파로서는 삼론종(三論宗)에서 한걸음 나아간 것으로, 인도에서는 용수(龍樹)가 크게 일으켰고, 구마라지바가 중국으로 전법한 공관불교를 실행적으로 전개하여 남북조의 불교사상을 통일한 것이 천태학이다. 지의 이후로는 천태6조인 당나라의 형계담연(荊溪湛然, 711-782)이 천태학의 체계와 이론을 정비완성하고, 송나라의 사명지례(四明知禮, 960-1028)가 중흥한 외에 종파로서는 융성하지 못했으나, 그 사상은 각종의 불교학에 크게 미치고 보편화되어 이른바 중국 제일의 불교 철학이라 칭한다.

특히 우리로서는 고려의 제관(諦觀 -960-?)이 송나라로 천태학의 전적들을 역수출하여 당 말이후로 쇠락한 중국의 불교학과 천태학을 부흥하게 하고, 천태4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하여 전폭적이고 대표적인 불교개론으로서 만국의 성전이된 사실을 주목해야겠다. 또한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천태종을 도입하여 고려사회의 사상적인 통일을 성취하고자 했던 일이며, 이 인연으로 전적을 수집정리하여 의천록(義天錄)이 만들어 진 문화적인 업적도 원융 총화(總和)의 제법사상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다.

(3). 법화경과 3대부(大部) --- 영산회상과 천태산

붓다가 영산회상에서 법화도량을 개설한 까닭은 새로운 내용의 교법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법화회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설법이 똑같이 최고의 법문임을 명백히 하기위한 최후의 심판다운 교법의 개회에 있었다. 말하자면 붓다의 설법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상하 우열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교법으로 성취하더라도 모두 같은 성자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곧 법의 개회와 함께 중생의 개회(開會)이다.

4성제(聖諦) 수행의 성문이거나 12연기의 관법을 닦은 연각이거나 6바라밀 행자인 보살이거나 같은 결과라고 하는 일승법(一乘法)의 대선언이 법화도량의 개설 목적이라는 것이다. 다만 중생의 근성이 익숙하지 못하고 안목이 열리지 아니하여 방편으로 시설하였을 뿐이요. 이제 그 사실을 개회로서 밝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승법은 마음법과 물질법의 차별도 일소하여 색심(色心)실상이라고도 한다. 반야경에서는 물질도 마음도 아닌 것이 실상이라 하고, 연기론 계통의 화엄경, 열반경, 기신론(起信論)들에서는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자못 유심론에 빠질 위험을 지적할 수 있으나, 색심(色心)실상은 대립적 편향성을 지양하고 실상을 상속적 원융원리의 제법으로 파악한 것이다.

또 기준을 달리하여, 붓다의 교설에 의하면 제법실상은 방편인 세상의 권능을 빌어서 진여의 실상을 들어낸 것이며, 중생의 살림에 맞추면 현실의 오만가지 행위가 최고의 선을 실현하는 행실이요 다만의 행위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무릇, 연꽃이 안으로는 씨앗을 품고 바깥으로는 빛갈과 향내며 맛을 갗추듯이, 안과 밖을 갈라잡을수 없는 원융의 묘덕으로 생명을 삼고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빛갈처럼 거짓스럽다(假有) 향내마냥 공허하다(空諦) 연자맛은 실상이다.(中道, 第一義諦)라는 식으로 갈라 잡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은 안된다기 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실상의 논리적인 표현이 원융삼제(圓融三諦)요, 수행 지침이 일심삼관(一心三觀)이며, 통칭하여 원융사상이다. 그러나 종교로서 볼때의 원융사상이란 제법의 현실을 그대로 둘수만은 없다는 약왕보살의 소신공양(燒身供養)과 같은 색신의 서원이요, 방광(放光)의 보살사상이다. 끝내 제법과 실상을 다투게 할 수 없는 무상의 생명성을 짐짓 본질로 불러 맡겨서 한 말이다.

천태학에서는 법화경 28품을 앞뒤 14품씩으로 나누어 본다. 앞은 적문(迹門)이라 하는데, 현실적으로 제법실상을 중심으로 붓다의 금생교설을 총괄하였고, 뒤의 본문(本門)은 시간적으로 제법의 영원성을 지시하고 붓다의 과거세의 온갖 행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형계(荊溪)는 특히 제2 품 방편(方便), 제14품 안락행(安樂行), 제16품 여래수량(如來壽量), 제25품 관음 보문(觀音普門)을 4요품이라 하여 중시하였다. 방편품은 적문의 핵심이고, 수량품은 본문의 중심이며, 안락행품은 실행의 정도, 그리고 보문품은 인류구호의 원행(願行)을 주제로 한다고 주석하였다.

그러나 천태학의 주요전적이라 할때 법화경보다는 삼대부로 불리는 법화경의 3가지 주석서를 더 중요시하는 것이 사실이다. 삼대부는 천태의 강술을 장안 관정(章安灌頂, 561-632)이 필수 정리한 것이다.

지의(智議)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그 가운데서도 만년에 학문과 수행이 원숙한 경지에서 독창적인 불교학의 체계를 세워 강설한 주석서 법화문구(法華文句)와 법화철학의 정수요 원론서인 법화현의(法華玄義)와 수행과 실천의 대도를 밝힌 마하지관을 3대부(大部)로 일러왔다. 먼저 법화현의는 법화경과 천태학의 총론적 연구서이다. 교상문(敎相門)의 대표저서로서 묘법연화경이라는 경의 제목을 중심으로하여 경전의 요지를 해석하고, 붓다일생의 교법을 체계적으로 논술하였다. 이른바 5중현의(五重玄義)로서 법화사상을 강론한 것이다. 곧 경의 제목 주체 근본 작용 교판의 다섯 기준에서 법화경을 중심으로 모든 경전들을 분석판별하여 법화우위를 주장한 것이다. 둘째의 법화문구는 법화경 28품의 모든 문장을 해석한 주석서이다. 여기에서도 네가지 기준을 설정하여 전형적인 경전해석학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설법의 인연에 따른해석이며, 그둘은 듣는이의 근기와 기호에 따른 해석이고, 셋째는 붓다의 입지가 법신(法身)의 본래불인가 아니면 화신불(化身佛)인가등에 따른 차별적 해석이며, 마지막은 관심법등 신행방법의 차이에 따른 해석이다.

3대부의 마지막인 마하지관은 천태종의 실천적 관심법을 체계화한 저서이다. 이책에서 소개하는 선정법은 천태이전부터 전해온 여러 경전들의 내용을 모으고 정리한 것이어서 새창안은 아니지만 지의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특징이 있어서 천태가에서는 흔히 이전에 듣지못한 새교설이라고 자랑한다.

이상의 3대부는 법화현의(玄義)와 법화문구(文句)를 합하여 법화소(疏) 또는 천태소라 하여 교학부문의 대표 저술이며, 마하지관은 문자 그대로 대승불교의 관심의 방법과 교리를 곁들인 수행에 관한 대표저서이다.

이 3대부에 대해서 지의대사가 법화현의석참(釋懺), 법화문구기(記), 지관보행(止觀輔行) 등의 주석서를 남겼기에 이방면 연구의 필수서로 유행하고 있다. 그리고 3대부에 버금하면서, 실용성에 있어서는 오히려 앞서는 천태학 내지 불교학의 입문적 필수교재로 고려 제관(諦觀)의 저술인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가 있다. 천태전적으로서는 가장 폭넓게 보급되고 있는 책이다. 천태사교의가 천태학만이 아닌 불교학의 보편적 입문서로서도 가장 간결 명확한 요령서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의천록에 오르기도 했으며, 조선 세조 대의 석보상절(釋譜詳節)에도 주요부분이 인용되었었다. 한편 국외에서는 더욱 유행하여 50여부의 주석서가 대장경에 수록되어있으며 기타본을 합하면 800여권으로 알려져있고, 현대학자들에 의해서도 20여종이 발간되었다. 전통적으로 3대주석서로 송(宋)나라 종의(從義)의 4교의집해(四敎義集解), 남송 원수(元粹)의 사교의비석(備釋), 원나라 몽윤(夢潤)의 사교의집주(集註)가 현전하고, 의천의 주석서도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4). 천태교학론 -- 법화 열반 8년이라.

중국의 남북조시대는 서쪽으로 부터 봇물 터지듯 밀어 닥친 불교를 수용정리하던 때이다. 수많이 번역된 경전과 다양한 교리가운데서 다양성과 차별성을 이해할수 있는 해석의 원리와 기준이 요청되었다. 교상(敎相)에 대한 판별과 해석이란 뜻으로 줄여서 교판(敎判)이라는 것이다.

교판설은 대개 2가지 근거를 가지는 데, 하나는 사람들의 이해능력과 취향에 따라 붓다의 설법도 다양해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다양한 경전중에서 어느 경전을 선택할 것이며, 다른 경전과의 관계는 어떠한가라는 점이다. 천태만상의 경전을 다 읽을 수는 없고, 읽는다 하더라도 이해의 문제는 따로인 것이다.

천태지의 당시에는 남3북7로 불려진 종애(宗愛)의 4시교(時敎), 승유(僧柔)의 5시교 등과 보리유지(菩提流支)의 2교설, 불타삼장(佛陀三藏)의 4종교(宗敎) 등이 있었고, 천태이후로도 삼론종(三論宗)의 3법륜, 법상종(法相宗)의 3시교, 화엄종의 5교10종 교판등이 있었다. 지의는 당시의 교판설들을 비판한 위에 5시8교(五時八敎)의 교판을 세웠다. 말하자면 5천여 경전중에 최고의 법화경임을 내세우기 위한 신교판인 셈이다. 후학의 입장에서 보면 천태학의 학습방법이고 불교학의 학습과정으로 제안된 것이기도 하다.

먼저 5시(五時)란 부처 일생의 교화과정을 5시기로 구분한 것이다. 제1 화엄시(時), 제2 아함시, 제3 방등시, 제4 반야시, 제5 법화 열반시의 5이다. 이 순서에 따라 최초 3주간의 화엄경설법을 시작으로 아함경을 12년동안, 보통 방등경으로 불리는 초기 대승경전들을 8년간, 그리고 22년동안에 반야경을 설법하고, 마지막으로 법화경과 열반경을 8년에 걸쳐 설법했다는 교판의 틀을 짜고, 각종의 경전들을 5시에 배속하여 교법의 시기별 특성에 따라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8교(八敎)라 함은 붓다일대의 설교를 교화방법에 따라 4가지로 분류하고 또 교화내용인 교법에 따라 넷으로 나눈 것을 합하여 8교라고 한 것이다. 먼저 화의(化儀) 4교란 교화의 의례의식에 따라 나눈 돈교, 점교, 비밀교, 부정교의 4교를 말한다. 문득 점차, 비밀, 비지정의 뜻으로 단도직입적인 방법의 교화를 돈교(頓敎)라 하고, 점진적으로 성숙시켜가는 교육을 점교(漸敎), 방법과 내용을 숨긴 것을 비밀교(秘密敎)라 하여 예컨데 대상도 내용도 비밀에 부친 교육이다. 그리고 돈점의 방법을 정하지 않고 함께쓰는 것을 부정교(不定敎)라 했다. 교육내용만은 비밀로 한 것이다.

5시와 화의4교(化儀四敎)가 크게는 종래의 교판설을 인용한 것인데 비해서 다음의 화법4교(化法四敎)는 지의의 독창적인 교판설로서 명칭과 내용의 모두가 창안된 것이다.

붓다의 교화 내용이라고 제한적인 표현을 하지만 사실은 8만대장경의 모든 경전을 뜻하고 불교라는 총체를 지시하는 것이니, 결국은 교판의 필요성이라는 본래의 문제에 대한 정답으로 제시된 것이 화법의 4교판이다. 말하자면 불교를 4가지 사상으로 분류한 것이다. 제1의 부류는 부파불교의 3장교라는 말을 줄여서 장교(藏敎)라고 했다. 부파의 소승불교에서는 경장과 율장과 논장의 구별이 확실한 점을 지적한 이름이다. 인도에서는 3장(藏)이 완비된 이후에 대승경론이 생겼기에 3장의 불교와 보살의 불교가 대비되었고, 상대적으로 대승시대가 되면 3장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구사론(俱舍論)으로 대표되는 장교는 분석의 방법으로 인간과 세계의 실체를 찾고자하였다. 그결과로 인간은 허상이요 거짓존재이며 잠정적일 뿐이므로 무아(無我)라고 주장한다. 주제성(主帝性)도 없고 동일성도 없는 또는 나마음대로도 아니되고 늘그대로의 나도 아닌 아공(我空)이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물질세계를 분석적으로 추구하여 5온을 비롯한 75종의 존재를 법유(法有)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분리해석만 했을 뿐 주체적인 삶의 실체도 객체적인 물질계의 원리나 본체를 찾지도 인정하지도 못한 소극적인 부정으로만 일관한 교리체계이다. 따라서 실체이전의 현실적 자기중심의 교법이며 현실상실의 무위(無爲)열반을 이상으로 하는 교설이다. 4제(諦)든 12연기의 수행이든 고뇌로 부터의 이탈만이 목적이고, 이목적을 성취한 성자를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이 장교이다. 5시설(五時說)로는 제2의 아함경(阿含經)의 시기에 해당하고, 화의4교로는 제2 점교의 초보에 해당한다.

제2부류의 통교(通敎)는 공통의 교법이라는 뜻이다. 아라한(阿羅漢)이 되고자 하는 성문 연각이라는 앞의 2교법과도 통하고, 다음번의 대승보살교법과도 통행하는 교법이다. 그러나 보살의 교화를 주로하고 2승(乘)을 곁들이는 초보대승의 교법이다. 따라서 어리석은 이는 장교와 같다고 하고, 근성이 예리한 보살은 이 교법에서 구경의 실상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통교의 교법은 일체가 공이라는 공사상이다. 장교가 아공법유설(我空法有說)을 중심사상으로 하였으나, 통교에서는 아법양공(我法兩空)으로 인간도 세계도 모두가 공법이며 공의 자체 사실마저도 부정한다. 장교에서는 현상을 분석한 결과로 분석공(分析空)을 주장했으나, 통교에서는 존재의 의미를 인식론적으로 비판하여 존재로서의 독자적인 자재성(自在性)과 시간적인 상주성(常住性)이 없으므로 근본적으로 존재라고 할 수 없다는 체공(體空)설을 주장한다. 공법이 곧 진리라는 공관불교를 통교라고 한 것이다.

장교가 존재에 대한 분석과 실체에 대한 부정에만 머문데 비해서 통교에서는 공이라고 하는 존재원리를 철학의 방법으로 주장한 점이 다르다. 그리고 공관불교에서는 공 자체마저 부정함에 따라 공도 유도 아닌 제3자가 존재의 제1원인자로 나타난다. 비유비공의 중도 또는 진여 실상 등의 존재자들이 그것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본체관의 등장이다. 이와 같이 뚜렷한 본체관(本體觀)이 나타나면 이미 통교(通敎)의 다음 단계인 별교(別敎)의 교법이 되고 만다.

실천적으로 통교에서는 개체적인 존재성이 사라지고 공관이라고 하는 통일된 총체성의 구현이 목적이 된다. 중생성취나 세계성취라고 하는 보살의 서원행(誓願行)이 통교의 이상이요 이념인 것이다. 따라서 장교에서는 버려졌던 현실이 보살의 도량으로서 재구성되고 재생되어 육바라밀과 같은 자리이타의 행도(行道)가 시설되는 것이다. 대품반야경과 같은 반야공관계통의 경전들이 통교를 대표하고, 종파로서는 삼론종이 대표적이다. 세 번째의 별교는 삼라만상의 근본인 존재 즉 본체에 대한 언급이 확실한 경전들의 교법이다. 사실 본체로서 확실한 정도만큼이나 역비례로 현실은 빛이 바래고 요원한 가능태의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런가 하면 그에 대한 존재론이나 성취론은 어렵고 복잡해 질 수 밖에 없다. 또한 그만큼 다른교법과는 결별적일 수밖에 없는 별교의 교법이다.

실제로 앞의 장교와 통교에서는 가유(假有)가 되었건 공관이 되었건간에 교리의 기준을 현실에 두고 있었으나, 별교에서는 그반대로 본체를 근거로 하여 현실을 설명하는 것 부터가 별나다. 진여.불성. 여래장. 일심. 중도.실상등이 대표적인 본체로서 주장되고, 현실과는 격리되고 융통하지 아니하므로 다만 중도일 뿐인 중도론이 별교의 교법인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으로는 현실을 정화하여 이상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걸음씩 정진해야할 상향적인 과정이 42계단 또는 52계단 등으로 설정되고, 떨쳐버리고 정화해야할 번뇌도 일상적이고 심리적인 미망이외에 무명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대상이 등장한다.

따라서 자아의 관심적인 해체와 관조에 의해서는 해결될 수 없는 자아이탈적인 결별과 단절이 수행의 방법들로 제시되고 , 교리는 탈이성의 부사의한 방향으로 흘러 신앙적인 연결과 현실적인 단절이 심화되며 신앙성이 조장된다. 어떤 경우에는 이를 두고 비로소 진실한 대승불교의 특성을 갖춘 교법이라고도 한다. 바로 이론의 심화는 엄밀한 현실의 관조이기 보다는 종교 신앙적인 체제의 확립과 강화 그리고 관념세계의 구축에 열심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순박하고 절실한 생명감을 상실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타성을 불러온다. 기신론의 진여연기설, 십지경(十地經)의 지론종(地論宗)등으로 별교를 대표하지만 실제로는 지의시대에 번성하던 진여연기론의 교리체계를 지적한 것이다. 화법4교의 마지막인 원교(圓敎)는 원만한 교법이라는 뜻이다. 차별이나 대립 또는 단절이나 고립을 인정하지않고, 공과 유는 물론이고 현상과 실상의 모두가 중도실상의 원만한 존재라는 말인가 하면 그러한 원리를 말하는 교법과 경전의 부류를 뜻한다. 다시 말해 워낙 현실세계에는 차별이나 대립 그리고 배제나 단절과 같은 이법이나 상황도 없을뿐더러 붓다의 교법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체라면 중도이던 실상이던 만유(萬有)를 조화하고 포용하고 절대화하는 창조와 생명의 실상이지, 차별화하고 파괴하고 떨쳐버리는 반존재 반현상의 허세나 허상 과 같은 역기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에 대한 표현도 다양하다. 원융부사의(不思議)의 원묘(圓妙), 본구(本具)만족의 원만(圓滿), 일즉일체의 원족(圓足), 초후무차(初後無差)의 원돈(圓頓)등이다. 이러한 중도의 교법이 부처의 본의라는 것이고 법화경으로 대표되며 대승경전중에서 3승의 구별을 없애고 1불승을 말하며, 융화적 중도를 내용으로 하는 유마경. 화엄경.반야경.영락경(瓔珞經) 등이 포함된다.

천태 6조 형계(荊溪)는 이 원융한 중도에 대해서 당시에 유행하던 진여연기설의 표현을 원용하여, ‘만물은 진여이니 불변하는 까닭이요, 진여가 곧 만물이니 인연을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그래서 우주는 대진여의 법계요, 사바세계가 곧 적광토(寂光土)라고 결론하였다.

천태지의는 법화현의에서 이같은 뜻을 담아 ‘색갈 하나 향기 하나 모두가 중도로다’. 또는 ‘세상살이 정치 산업 골고루 실상일세’ 라고 적었다.

철학에서는 이를 현상즉실재론, 천태학에서는 ‘구(具)의 사상’이라 하여, 공관철학에서 비(非), 부(不), 무(無)와 같은 부정접두사로서 표현하려든 것과는 다른 듯이 긍정화하였다. 인간도 세계도 모두가 개방되고 자유화된 개회법문의 본방에서 부정접두사의 존재는 양비(兩非) 아닌 백비(百非)라 할지라도 실상 아닌 부정만이 강화될 뿐이다.

실천적으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4제법에 대해서도 3장교의 경우에는 생멸의 이원론으로 해석하여 8정도를 닦아(生), 번뇌를 없앤다(滅)는 식의 수행법이므로 생멸의 4제설이라 하고, 통교에서는 일체공으로 탕탕한 가운데 닦고 버리고 얻을 바의 기반과 경계가 붕괴되어 무생무멸(無生無滅)의 번뇌요 열반이므로 무생(無生)4제설이라 한다. 그리고 별교에서는 하나의 실체와 무량한 현상계를 차별화하고 수행의 길도 무량하듯이 무량4제(無量四諦)라 정의했다.

그런가 하면 원교에서는 일체가 원만하고 신묘한 존재이며 구족한 존재이므로 닦고 말고 할 작위의 입지가 박탈되었으므로 무작(無作)의 4제라고 말한다. 원교의 무작원만에서 작위를 일으키는 것, 이것이 곧 보살의 서원행이고 무연(無緣)자비이며,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교의 도량에서는 모든 시시비비가 녹아지고, 다만 숨쉬고 보고 듣고 말하는 자연한 현실만이 활연하여져서 구체적이고 평범하며 안이한 수행의 길에 들게 된다. 수행론에 있어서도 시대의 조류와 유행을 따라 유심사상의 영향으로 일념삼천설과 같은 관념체계의 구성이 있긴 하지만 그나마 제법실상의 개회설의 전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시 제법실상은 천태원교의 생명의 원천이다. 그 원천적인 처방이 무작의 4제설이고 법화일승보살의 묘행이다.

지금까지 본 화법4교(化法四敎)의 내용, 말을 바꾸어 부처의 교육지침은 결국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라는 존재관의 문제였다. 장교에서의 현실기준의 유(有)의 존재관, 통교에서의 부정적 공의 존재관, 별교에서의 중도의 초월적 존재관이라는 이 셋은 진리표현의 개념도구로서 유제(有諦) 공제(空諦) 중도제(中道諦)의 3제라고 한다.

장교와 통교와 별교에서는 3제를 각각으로 편파로 주장하므로 융통하지 않은 것이라 하여 각별3제(各別三諦)라 한다. 그러나 천태원교에서는 원융3제(圓融三諦)라 하여, 3제를 한사물의 존재성에 대한 3범주로 보고 서로 일체로서 존재의 융통무애한 존재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천태학의 원융사상이자 구조이론이다.

수행으로 보면 나날의 체험과 갖가지 일들이 다만 공이며 유이며 중도인 어느 하나만이 아니라 3제원융의 원만 원묘한 진실임을 증득(證得)하는 일이 가장 직접적인 진리에의 동참이요 동사(同事)이며 교법의 수행이다. 여기에서 주체적이고 구체적이며 용이한 수행방법으로서 한마음에 삼제를 관조하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관심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천태실상론의 바탕에서는 제법이라 한대로 구태여 마음만을 거론할일이 아니다. 오히려 색심실상이래야 객관성이 있지 일심이란 오해스럽다. 이점은 앞서 지적한 바로 시대상황의 탓이자, 한편으로는 무상변전(無常變轉)의 현실에서 가장 구체성과 주체성 그리고 핵심적이며 절실한 한기준을 선택한다면 역시 일심을 가장 확실한 몫으로 판단한 것이 천태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심(一心)은 현상계나 연기의 본원으로서가 아니라 역시 원융실상의 주체일 따름이다.

원융3제(圓融三諦)를 자기화하는 관법이 원융삼관이고, 기준을 일심으로 할 때는 일심삼관이다. 관법이란 선정 삼매들과 유사한 말로 천태에서는 보통 지관(止觀)이라 한다. 지(止, samatha)는 삼매와 유사한말로 평정이나 평정한 상태라는 뜻이며, 관(觀, vipasyana)은 관조 인식 달관 등의 뜻이다. 흔히 점차(漸次止觀)지관 부정(不定)지관 원돈(圓頓)지관을 천태가의 3종지관으로 다루기도 하지만 원교의 지관설은 원돈지관이다. 그리고 원돈지관의 체계는 대발심 -방편행 -정수행(正修行)으로 이루어진다.

(5). 실상(實相)의 실행 -- 원돈(圓頓)지관

불가에서는 옛부터 듣는 지혜(聞慧)와 생각하는 지혜(思慧)와 실행하는 지혜(修慧)를 3혜라 했다. 실행의 지혜란 생각으로 자각한 내용을 실천하는 지혜이다.

불교학은 학문 일반이나 과학과는 다르다. 듣고 이해하고 깨달은 바를 생활로 실행시키지 못한다면 불교 곧 깨달음의 종교도 또는 깨달음도 아닌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거짓이거나 비슷한 것이거나 속임수일 뿐이다. 불교가 불교이기 위해서는 몸으로 구체화하고 실현시켜야 불교인 것이다. 실행과 수도가 빠진다면 종교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을 추구하는 학문인 과학일 따름이다. 종교는 객체적인 관찰이나 인식을 다시 주체화하여 실행하고 체험하고 증득하는 점에서 과학과 다르다. 특히 불교에서는 학문이란 배우고 묻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체험하고 실현하는 인간형성의 행도(行道)라는 점에서 공부(工夫)라는 말을 즐겨 써왔다. 붓다는 깨달은 이가 아니라 깨달음을 이루는 이이고 깨달음대로 실행하는 성자요 인도자이다. 또한 그가 보인 깨달음이나 교화도 인간성취의 깨달음이요 세계의 구호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행도가 불교인 것이다.

따라서 이와같은 실행사상이 강하게 부각된 결과가 교관쌍미이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천태학의 본질이 일실상(一實相)이요 그 전체적인 전개원리가 원융삼제이며 상관성의 전개가 일념삼천설이듯이 교법과 지관을 일체화한 것이 원돈지관(圓頓止觀)이다. 지의는, 당시의 불교계가 교학적으로 정리되고 체계화되면서 이론적인 이해를 위주로 하던 교계의 상황을 실행불교로 전환하여 법화현의에서의 표현처럼 생활실상을 주장한 것도 원돈지관의 사상적 기초위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천태학의 수행체계인 25방편은 수행방법의 구체화로, 4종삼매는 수행범위의 개방으로 생활화하고, 10승관법은 생활의 내용을 묘법화한 개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생활화의 실행으로 규정한 4종삼매는 천태지의가 임종에 임해 제자들에게 ‘4종삼매를 등불로 삼으라’고 유시한 점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한두가지 실예를 더듬어 본다. 25방편의 경우, 처음에 5가지 인연을 갖추라고 한 내용의 첫째는 계율을 갖추어라. 둘째, 의복과 식량을 갖추어라. 셋째는 조용한 곳을 마련하라 등이다. 삼매론에서도 상좌삼매의 경우에, 90일간을 기간으로 하라, 원융실상의 묘법을 관조하라, 권태로울 때에는 칭명(稱名)염불로 도우라고 하였다. 엄격하기 마련인 수행의 분상에서 ‘권태로울 때’라는 표현 하나만해도 원돈지관의 현행적인 동사(同事)의 감각이 물씬하다.

마찬가지로 일심삼관의 일심법의 기준설정에 대하여도, ‘한발보다는 한자요, 한자보다는 한치이니, 색 수 상 행의 4온은 접어두고 다만 식온을 관조하라 식온은 마음이라’라는 말로 일심이 기본경계이며, 무엇보다도 확실한 현실의 구체성이라는 현행의 행도에 대하여 선택을 우선하고 있다.

그리고 이 현행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원돈의 의미로 이렇게 대답한다. ‘원돈이란 처음부터 실상을 인연하며, 경계를 조작하면 곧 중도실상이요, 진실 아닌 것이 없다.’라고 했다. 처음과 끝이 차이가 없는 것이 원돈이라고 한 실상이 노출된 정답이다.

그러기에 큰마음을 내어라(發大心)에서의 큰마음의 내용은 곧 4제의 교법이요, 4홍서원의 서원심(心)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곧 자타를 대자대비화하는 무작의 4홍서원이 원교행실(圓敎行實)의 큰마음인 것이다.

그런데 법화경의 경설대로 수행한다면 법사품이나 공덕품에 나오는, 수지 독경 송경 해설 서사(書寫)의 5종법행이 일반적인 내용이고, 이밖에 특정의 교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예를 들면, 관음보문품의 칭명염불이며 보현품의 독송수행하며 약왕보살품의 소신(燒身)공양등은 법화행자(行者)의 실천규범으로서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천태지의는 전통적인 다양한 수행법들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방법과 형식에 따라, 25방편의 예비과정과 4종삼매의 정리과정을 설정하고, 마지막으로 10승관법(十乘觀法)의 원돈지관이라는 주관적 관행의 방법을 창안하였다.

형계담연은 지관대의(止觀大意)에서 ‘원돈지관은 모두 법화경설에 따른 것이다. 원돈지관은 법화삼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 10승관법의 명칭마저도 법화경 제2 방편품의 10여시(十如是)와 제3 비유품의 대백우거(大白牛車)의 일승(一乘)을 따와서 십승이라 고안하고 관법으로 창안하여 십숭관법이라 했다는 것이다.

마감으로 마하지관의 제 1장 대의 중에서, 5략(五?)이라는 내용의 목차를 적어 소개한다. 큰마음을 내어라(發大心), 큰수행을 닦으라(修大行), 큰과보를 챙겨라(感大果), 큰믿음을 가저라(裂大網), 큰곳으로 가거라(歸大處) 의 다섯이다